태안사와 조태일 시인

발바닥이 다 닳아 새 살이 돋도록 우리는/ 우리의 땅을 밟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 숨결이 다 타올라 새 숨결이 열리도록 우리는/ 우리의 하늘 밑을 서성일 수밖에 없는 일이다.// (…) 버려진 땅에 돋아난 풀잎 하나에서부터/ 조용히 발버둥치는 돌멩이 하나에까지/ 이름도 없이 빈 벌판 빈 하늘에 뿌려진/ 저 혼에까지 저 숨결에까지 닿도록// 우리는 우리의 삶을 불 지필 일이다./ 우리는 우리의 숨결을 보탤 일이다./ 일렁이는 피와 다 닳아진 살결과/ 허연 뼈까지를 통째로 보탤 일이다.-조태일 ‘국토서시(國土序詩)’에서

동리산 태안사 입구에 위치한 조태일시문학기념관은 한 민족시인의 삶과 시세계를 담아 세워졌다. ⓒ유성문
동리산 태안사 입구에 위치한 조태일시문학기념관은 한 민족시인의 삶과 시세계를 담아 세워졌다. ⓒ유성문

시인은 이미 죽음을 예비하고 있었던 것일까.

파란색 바탕에 검은 글씨로 ‘시(詩)’라고 쓴 동그라미 깃발을/ 광개토대왕비 곁에 나란히 꽂고/ 내 유서를 20년쯤 앞당겨 쓸 일은 1999년 9월 9일 이전 일이고…

1970년에 간행된 시집 <식칼론>에 실린 시 ‘간추린 일기’에서 30년 후 자신의 죽음을 마치 예견이라도 했던 양 시인 조태일은 1999년 9월 7일 서울 아산병원에서 타계했다. 그해 그의 여덟 번째 시집이자 마지막 시집인 <혼자 타오르고 있었네>가 간행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쉰여덟이란 어찌 보면 길지 않은 세월 동안 시인은 질곡의 역사와 고난의 생애가 굽이쳐간 길목마다 시를 남겼다. 그리고 시인은 마침내 그의 시집(<나는 노래가 되었다>) 제목처럼 노래가 되었다.

태안사 부도전에는 보물로 지정된 광자대사 부도(제274호)와 부도비(제275호)가 소슬한 대밭을 배경으로 서 있다. ⓒ유성문
태안사 부도전에는 보물로 지정된 광자대사 부도(제274호)와 부도비(제275호)가 소슬한 대밭을 배경으로 서 있다. ⓒ유성문

전남 곡성 동리산 태안사 들머리에 위치한 조태일시문학기념관은 2003년 민족시인 조태일의 문학세계를 기리고, 예비문학도들의 창작공간을 마련한다는 취지로 건립되었다. 생전에 시인은 ‘나의 시는 태안사에서 비롯되었고 태안사에서 끝이 난다’고 했다. 1941년 태안사에서 대처승의 아들로 태어난 조태일은 196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 ‘아침선박’이 당선되면서 문단에 등단했다.

그 후, 태안사 주지였던 그의 아버지가 여순반란사건의 와중에서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광주로 급히 이거하면서 남긴 유훈(정확한 까닭은 모르겠으나 아버지는 그에게 30년이 지난 후에나 태안사를 찾으라고 했다)에 따라 꼭 30년 만에 친구 박석무(다산연구소장)와 함께 고향을 찾았던 시인은, 또 한 30년이 지난 후쯤 세상을 버렸으나, 2003년 그가 태어난 태안사 기슭에 마침내 조태일시문학기념관이 건립되었으니, 이로써 그의 또 하나의 예견(‘시’의 깃발)조차 그럴듯하게 마무리된 셈이다.

섬진강과 보성강이 만나는 압록은 참게와 은어의 산지로 유명하다. ⓒ유성문
섬진강과 보성강이 만나는 압록은 참게와 은어의 산지로 유명하다. ⓒ유성문

바람이 맑은 목소리로 서걱이는 죽곡면, 그렇게 대가 무성한 동네였으리라. 곧고 거침없이 하늘을 향해 솟아난 대의 기상처럼 한 시인의 노랫가락이 동리산에 스며있다. 죽형(竹兄) 조태일 시인. 그의 유년시절은 우리 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과 맞닿아 있다. 그리고 그를 담아 영원히 기억하고자 하는 집이 여기에 세워졌다.

조태일 시인이 생전에 창간, 주재한 시 전문지 <시인>의 복간에 앞장섰던 시인 이도윤이 읊조렸던 것처럼 조태일시문학기념관은 시인의 시세계와 그대로 닮아있다. ‘목구조로 구축된 40m나 되는 길고 통 큰 기념관은 동서축으로 드러누워 있는데, 서쪽 끝은 땅속(국토)을 향하여 대지에 뿌리내리고 동쪽 끝은 몸을 들어 땅위(삶)를 굽어보는 형상’으로, 시대적 억압을 뚫고나오는 민중의 강인한 의지를 담고 있다. 역시 시인이기도 한 건축가 이윤하의 설계로 지어진 이 건물은 제1회 대한민국 목조건축대전에서 본상을 수상한 바 있다.

호남고속도로를 타고 내려온 경우 태안사의 관문이 되는 석곡은 가을이 찾아오면 코스모스축제가 열린다. ⓒ유성문
호남고속도로를 타고 내려온 경우 태안사의 관문이 되는 석곡은 가을이 찾아오면 코스모스축제가 열린다. ⓒ유성문

전북 순창 쪽에서 곡성의 동쪽 벌을 가로질러 달려온 섬진강 물줄기는 압록에서 곡성 서쪽 자락을 타고 내려온 보성강 물과 한 몸을 이룬다. 여기서 몸집을 키운 섬진강은 구례를 휘돌아 지리산의 크고 넉넉한 산그늘에 의지하여 하동으로, 광양으로 흘러 내려간다. 압록에서 잠시 섬진강과 지리산을 뒤로 하고 보성강 물줄기를 따라 거슬러 올라가면 동리산 자락에 자리 잡은 천년고찰 태안사가 나온다. 여기가 조태일 시문학의 탯자리다.

태안사는 신라시대 구산선문의 하나인 동리산파의 중심사찰로 한때 송광사와 화엄사를 말사로 거느릴 정도로 사세가 컸으나, 고려시대부터 부흥하기 시작한 송광사의 위세에 눌려 위축되고 조선시대에 이르러 쇠락의 길을 걸었다. 하지만 깊은 산과 맑은 물줄기는 여전하여 산문을 찾는 이의 마음을 한껏 고즈넉하게 만들어 놓는다. 태안사의 관문 격인 석곡은 돌실나이와 돼지불고기로 유명하며, 가을이면 코스모스축제가 열려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필자 약력>

-여행작가

-편집회사 투레 대표

-한국기록문화연구협동조합 이사

-<문향을 따라가다>(어문각) 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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