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걸어보는 제주도 길] 산 사람과 죽은 영혼의 안식처①
[다시 걸어보는 제주도 길] 산 사람과 죽은 영혼의 안식처①
  • 남국성(여행가)
  • 승인 2018.10.02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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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사람들의 주거지

평화로운 선사인들
평화로운 선사인들

신화의 세계에서 나오니 선사시대 여행이 기다리고 있다.

선사시대(先史時代)는 문자가 발명되기 전의 시대이니 그 때의 생활상을 증언해 주는 것은 사람들이 남겨놓은 흔적들이다. 예를 들어 화석이나 집자리터, 돌무덤, 벽화, 조개껍데기, 각종 그릇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지난 2003년 10월에 제주도에서 5만 년 전 구석기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 발자국이 발견됐습니다. 말과 코끼리 발자국으로 추정되는 화석도 발견돼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아시아에서 발자국 화석이 발견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고 세계에서는 7번째입니다.

한국교원대 김정률 교수와 충북과학고 김경수 교사는 지난해 10월 남제주군 대정읍 상모리와 안덕면 사계리 일대에서 5만 년 전으로 추정되는 구석기 시대 사람 발자국 100여 점을 발견했다고 밝혔습니다.

발자국 길이는 21센티미터에서 25센티미터 정도이며 뒤꿈치와 중간 호, 앞꿈치가 선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이번 발견은 제주 빌레못 동굴 구석기 유적과 더불어 5만 년 전 고대 한반도에서 인류가 활동한 직접적인 흔적을 찾아낸 것입니다.

또 이 발자국은 현생인류 직전 단계인 호모 사피엔스의 것으로 인류의 이동경로 해석과 신체 구조 유추에도 중요한 단서를 제공할 것으로 보입니다. -하략- <연합뉴스. 2004. 4>』

일부 학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제주의 역사는 지금으로부터 7~8만 년 전 구석기 시대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아무튼 이번 화석의 발견으로 제주도에 사람과 짐승이 나타난 시기는 최소 5만 년 이전이 되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그러나 제주도의 독자성을 따져볼 때 이건 별 의미가 없다. 5만 년 전이라면 제주도는 육지의 일부분으로 연결돼 있던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렇든 말든 이런 전문적이고 과학적 검증이 필요한 부분은 학자님들께 맡기기로 하고 나는 제일 먼저 삼양동 선사시대유적지로 방향을 잡았다.

일주도로를 타고 화북을 지나면 곧 삼양동이 나타나는데, <삼양동 선사시대 유적지>라는 표지판을 따라 왼쪽으로 향하자 검은모래해변으로도 유명한 제주지역 최대 규모의 마을유적지가 나타난다. 기원 1세기를 전후로 한 시기의 집자리 230여 기가 확인되었으니 그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대략 한 집에서 너댓 명씩만 지냈다 하더라도 마을 인구가 1,000명은 너끈히 넘을 정도니 지금으로 치면 중심지임에 틀림 없다. 요즘이야 사막이고 산 위이고 가리지 않고 빌딩을 짓지만 예전에는 주위 자연환경을 따져보고 거처를 정했을 것이다. 주변에 물이 있고 산이 있는데다가, 특히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니 이만큼 괜찮은 명당도 찾기 어려울 것이다.

1996년 대한토지구획정리사업 과정에서 토기와 청동기시대 집터가 확인되면서 유적의 존재가 알려지기 시작했다는데, 발굴 당시의 영상과 사진을 보니 각종 생활도구는 물론이고 공동작업장, 회의장, 창고시설, 쓰레기 폐기장, 돌담, 마을 외곽의 석축, 그리고 주변의 지석묘 등 집단생활에 필요한 시설이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다.

땡볕더위를 피해 들어간 실내전시관에는 돌화살촉과 흙으로 만든 그릇 등 생활도구와 각종 나무열매, 콩, 보리, 볍씨 등이 전시되어 있고, 야외전시관에는 집자리, 창고, 바닥에 구멍을 뚫고 나무막대기 여러 개를 가로놓아 작물을 저장하는 저장공, 야외토기요지, 불땐자리와 배수로, 고인돌 등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띠로 지붕을 이은 움집이 여러 채 있는데, 반지하움집과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도록 만든 고상가옥, 유난히 크기가 큰 집 등이 생생하게 복원되어 있다. 그 중 고상가옥, 그러니까 원두막처럼 생긴 이층집을 두고 선배와 옥신각신했다.

“홍수나 들짐승, 외적, 벌레, 습기 등으로부터 안전을 위해 이층집 지은 게 아닐까?”

“그러면 모든 집을 다 이층으로 지었겠지요.,”

“그야 각자의 취향이겠지.”

“이렇게 큰 마을이라면 족장이 있었을 것이고, 아마 집단 내에서의 지위를 나타내기 위해 특별히 높게 지은 게 아닐까요?”

“저기 큰 움집이 족장의 집일 거라고 설명되어 있던데.”

“집이 크다는 건 식구가 많아서일 수도 있지요.”

“그럼 혹시 마을회관이나 경로당 아니었을까?”

그러나 고상가옥 옆의 해설판에 나와 있는 설명을 보고 둘은 맥없이 픽 웃고 말았다.

이 주거지는 땅을 파서 기둥을 세우거나 박아 넣어서 만든 건물로 굴립주주거지(掘立柱住居址)라 하는데 고상가옥의 형태이다. 발굴조사 결과 이 고상가옥은 10-12동의 원형 움집이 모인 단위주거군 내에 1동만 자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중요물품이나 곡식과 씨앗을 보관하는 공동창고의 역할을 했던 건물로 추측된다.

움집이 늘어서 있는 마을터로 들어서니 남녀 성인과 어린아이의 조형물이 우리를 맞이한다. 머리띠를 질끈 동여맨 채 나무를 짚고 서있는 남성은 한눈에도 기개가 있어 보인다. 그 옆에는 목걸이와 팔찌로 한껏 멋을 부린 여성과 개구쟁이 티가 가득한 사내아이가 당장이라도 말을 건넬 듯 서있다. 이들이 패용하고 있는 옥환과 조개목걸이 같은 장신구는 당시 사람들의 권력을 상징하는 것들이다.

선사시대인들과 고상가옥
선사시대인들과 고상가옥

유적지를 둘러보며 선배는 연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뭘 좀 알아냈다는 표정이네요?” 장난삼아 물어보니 선배는 물어봐주길 기다렸다는 듯이 “그러엄!” 하면서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는다.

“여기 살던 사람들은 들짐승을 사냥하고 농사를 짓고 낚시도 했어. 바느질을 해서 옷도 만들어 입었고, 음식을 익혀 먹었어. 그리고 신분질서가 엄격한 계급사회였어.”

옳은 설명이다. 문자로 기록되어 있지 않아도 고대인들이 남긴 유물은 선배가 말한 내용을 이야기해 주고 있다.

선사인들이 이곳에 정착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우선 지대가 낮은 곳에서 솟아나오는 용천수에서 생활용수를 쉽게 얻었을 것이고, 바다가 가까운 데다가 바로 옆에 산(원당봉)이 있어 어로와 수렵활동 역시 유리했을 것이다. 거기다가 점토질의 흙은 토기 등 생활도구를 만들기에 적합했으니 사람이 모여 살기에는 최적의 장소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단 말이야.” 하면서 이영권 선생이 지은 『제주역사기행』의 내용을 소개해 줬다.

「그런데 기원 후 100년 경 이 마을은 역사에서 사라져 버렸다. 불에 탄 흔적도 없이 유물은 고스란히 남아 있는 상태에서 폐허가 되어 버린 것이다. 전염병이 마을을 몰살시켰는지, 아니면 탐라국 건국의 핵심 세력인 용담동 사람들에 의해 쫓겨난 것인지… 아직은 이를 해명해 줄 만한 단서가 나오지 않았다.(제주역사기행 16~17쪽)」

과거 생활의 최소단위는 가족이었을 것이다. 그러다 주변 자연과 또 다른 집단의 위협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부족을 형성하였을 것인데, 애초의 작은 집단은 세력이 커지는 순간 이기적 집단으로 변모하면서 세력다툼을 통해 영역을 확장해 나갔을 것이다. 그렇다면 용담동 세력에 의해 쫓겨났을지도 모른다는 이 선생의 추리에 공감이 간다. 그러나 한 순간에 흔적 없이 사라졌다는 것에 대해서는 궁금증이 풀리지 않는다.

“혹시 외계인에게 납치라도 당한 건 아닐까?” 선배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도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틀림없이 그런 것 같아요. 이렇게 있지 말고 빨리 외계인의 흔적을 찾읍시다.”

실없는 농담에 잠시 더위를 잊었다.`

삼양에서 출발해 두 번째로 정한 행선지는 조천읍 북촌리에 있는 일명 ‘고두기엉덕 바위그늘집자리’이다. 고두기엉덕은 북촌리 해안일주에서 남쪽으로 300미터 정도 지역의 지명인데, 그곳 왼쪽에 용암동굴의 천정부가 무너져 내려 만들어진 집자리가 아늑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 건축기술이 없었던 옛날 사람들은 동굴이나 바위 아래에 나뭇잎을 깔고 덮어 추위와 짐승을 피하다가 나중에 움집을 지어 지내게 된다.

고두기엉덕의 바위그늘집자리
고두기엉덕의 바위그늘집자리

고두기엉덕의 바위그늘집자리에서는 각종 토기와 동물뼛조각, 조개류, 불에 탄 산초 등 신석기 후기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흔적이 있고, 그 위로 청동기시대, 탐라시대 유물이 순서대로 쌓인 걸로 봐서 아주 오랜 세월에 걸쳐 사람들이 대대로 살아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것은 북촌마을이 그만큼 자연적인 생활환경이 좋았을 거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 부근의 주민이 어쩌면 그 옛날 이곳에 살던 선사인들의 피를 물려받은 후손이 아닐까? 오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다시 한 번 유심히 바라보게 된다.

이렇게 바위나 동굴입구를 집으로 삼은 곳은 구좌읍 김녕리의 궤네기 동굴입구집자리, 함덕리의 억수동 바위그늘집자리 등 제주도 여러 군데에 있다. 아, 그러고 보니 나도 바위그늘집자리를 발견한 적이 있다. 얼마 전 자동차 에어컨으로도 감당할 수 없는 땡볕을 견디지 못하고 더위를 피해 한경면 조수리에 갔다. 그곳은 친하게 지내는 후배와 놀러 간 적이 있는 곳으로 작은 연못과 그늘이 시원한 오래된 나무, 팔각정 모양의 쉼터가 더위를 물리는 곳이다. 그런데 뜻밖에 그곳에서 바위그늘집자리가 분명한 장소를 발견했다. 설명해 주는 표지가 없어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크기만 좀 작을 뿐 생김새나 위치가 북촌바위그늘을 빼닮았다. 바로 앞에는 웅덩이가 있어 사람들이 식수로 사용했을 거라는 확신을 더해줬다.

동굴입구, 바위그늘, 움집 등이 살아있는 사람들의 주거지라면 죽은 영혼의 안식처는 고인돌이다. 그렇다면 내가 찾아가야 할 곳은 정해진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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