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고대 그리스 의학 — 찬란한 이성의 빛

고대 그리스 엘리스 국왕은 용맹한 사위를 고르기 위해 사위를 맞이하기에 앞서 반드시 먼저 자신과 전차 경기를 하도록 규정했다. 이에 열세 명의 후보자가 나섰으나 모두 국왕의 긴 창을 맞고 목숨을 잃는 비참한 결말을 맞이했다. 그리고 열네 번째 후보자로 제우스의 손자 펠롭스가 나섰다. 그는 공주가 남몰래 사랑하고 있던 청년이었다. 사랑의 힘을 얻었기 때문일까? 펠롭스는 경기에 이겨 공주를 차지했다. 펠롭스와 공주는 제우스 신전 앞에서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으며 자신의 승리를 자축하기 위해 전차, 결투 등의 경기를 개최했다. 이것이 바로 최초의 고대 올림픽의 전신이 되었다.

기원전 9~8세기, 그리스에는 폴리스를 중심으로 노예사회가 형성되었다. 200여 개의 폴리스들은 저마다 독자적인 정치를 하고 있었으므로 서로 간에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300》은 스파르타 용사들이 일곱 살 때부터 철저하게 집단생활을 하며 전사로 성장하는 모습을 담아낸 영화이다. 체육경기는 용맹한 전사를 육성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당시에 부상병을 치료해 전력 손실을 최소화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덕분에 자연히 의학이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계속된 전쟁으로 민생은 점점 더 피폐해졌다. 결국 스파르타의 왕과 엘리스의 왕은 에케케이리아(Ekecheiria, 신의 평화)라는 이름의 올림픽 휴전을 맺게 되었다. 군사훈련이 목적이었던 체육경기는 점점 평화와 우의를 다지는 올림픽으로 발전했다. 올림픽 정식경기가 열리기 전, 사람들은 올림피아 제우스 신전 앞에 모여 제단에 성화를 올리고 그 성화를 손에 든 봉송자들은 그리스의 각 폴리스를 돌며 ‘전쟁을 멈추고 올림픽에 참여하라’고 외치고 다녔다.

이에 성화가 도착하는 곳마다 전쟁이 멈추고 휴전이 시작되었다. 보복도 전쟁도 잊고 사람들은 올림픽 경기에만 열중했다.

기원전 776년은 고대 올림픽이 정식으로 역사에 기록된 해로 이때를 제1회 올림픽으로 보고 있다. 당시에는 192.27미터의 경기장을 달리는 한 가지 경기밖에 없었다. 펠로폰네소스의 통치자 이피토스는 종교와 체육이 결합된 경기를 4년마다 한 번씩, 윤년 하지를 전후해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기원전 146년, 로마제국이 그리스를 통치하게 된 후에도 올림픽 경기는 계속 개최되었다. 그러나 올림피아 외의 다른 곳에서도 경기를 개최했다. 기원전 80년에는 제175회 올림픽 경기가 로마에서 개최되었다. 그러나 393년에 기독교를 국교로 정한 로마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TheodosiusI)는 고대 올림픽 경기가 이교도의 활동이라고 여겨 이듬해에 이를 폐지한다고 선포했다.

고대 올림픽 경기는 기원전 776년부터 394년에 이르기까지 1168년 동안 293회에 걸쳐 개최되었다. 그리스인들은 이 시기를 거치면서 가장 이상적인 교육이념을 확립했다. 책임감 있는 폴리스 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지·덕·체(智·德·體)를 겸비한 교육을 받아야 했다. 한편 여성은 고대 그리스의 체육경기에 절대 참가할 수 없었다.

본래 선수들은 어깨에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옷을 걸쳤다. 한 번은 경기를 치르던 도중 한 선수가 어깨에 걸치고 있던 사자가죽 옷이 벗겨졌는데 이 선수는 아랑곳하지 않고 알몸으로 끝까지 경기에 임하여 결국 월계관을 차지했다. 예기치 않았던 이 사건은 인체의 근육미를 발견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이때부터 나체로 경기에 임하는 것이 하나의 유행이 되었으며 후에는 아예 나체로 경기에 임해야 한다는 규정도 생겨났다.

올림픽 경기는 고대 그리스의 ‘힘의 시대’를 상징한다. 오늘날 선수들이 훈련하는 장소를 일컫는 Gymnasium은 그리스어로 나체를 뜻하는 gymnos에서 유래한 것이다. 당시 선수들은 훈련할 때도 나체로 임했기 때문이었다. 실제 경기가 시작되면 선수들은 온몸에 올리브유를 발라 찬란한 태양 아래서 건장한 근육미를 뽐냈으며 이는 관중에게 결코 놓칠 수 없는 볼거리였다.

올림픽에 참가하는 선수는 폭행, 신을 모욕하는 언행 등을 범한 적이 없는 자유 시민으로 제한되었다. 선수로 선발되면 자신의 거주지에서 10개월 동안 강도 높은 훈련을 실시한 후 다시 올림피아에서 본격적인 연습을 시작했다.

선수의 훈련을 돕는 코치들은 반드시 경험이 풍부한 체육 교사여야 했으며 어느 정도 수준의 의학적 지식까지 겸비하고 있어야 했다. 선수들이 경기나 훈련 도중에 부상을 당하는 경우가 빈번했기 때문이다. 코치들은 선수들을 효과적으로 지도하기 위해 선수의 몸 상태를 파악해 음식을 합리적으로 조절하는 것은 물론 부상을 당했을 때 상처 소독 및 붕대 감기 등 응급조치를 취할 줄도 알아야 했다. 골절을 비롯해 운동 중에 발생하는 각종 부상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외과의술이 발달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코치들의 절반은 의사나 다름없었다.

체육경기를 통해 축적된 의료경험과 치료의 노하우는 의학 발전을 촉진하게 되었으며 이를 통해 건강의 중요성, 건강한 생활방식의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체육경기가 성행하면서 그리스에는 목욕탕, 안마소와 같은 대중시설이 들어섰으며 식이요법, 공공위생 등과 같은 보건의료체계가 확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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