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고대 그리스 의학 — 찬란한 이성의 빛

철학의 시대, 이성의 시대로 불리며 인류의 행복한 유년기를 장식했던 시대! 기원전 6세기 무렵,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노예제 사회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리스는 반도 국가로 해안선의 굴곡이 매우 심했다. 또한 산이 많고 평지가 적어 물자가 풍부하지 못했다. 이러한 자연적 환경 때문에 그리스는 해상 무역이 발달했다. 다른 나라들과 활발한 교역이 이루어지면서 그리스인들은 바빌론, 이집트의 발달된 의학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기원전 4세기 알렉산더 대왕이 인도까지 세력을 확장하면서 그리스는 인도와도 의학 교류가 이루어졌다.

사물을 깊게 탐구하는 습성을 지닌 그리스인들에게 인간과 자연은 모두 그들의 탐구 대상이었다. 철학적으로는 인류와 세계를 이해하고자 노력했다. 그들이 창조한 문명은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변하지 않고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다.

그리스인들의 해외 이민이 활발해지면서 마살리에서 비잔틴으로, 보티아에서 시노페까지 세력이 확장되었으며 그리스의 식민지는 서유럽, 남유럽, 북아프리카, 소아시아를 비롯해 흑해 연안까지 뻗어나갔다. 이집트 종교와 페르시아 철학, 페니키아 문자, 바빌론의 천문, 이민족의 다채로운 예술 등이 그리스로 유입되어 융합 발전했다.

한편, 그리스와 소아시아의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굴된 고대 그리스의 외과용 시술도구는 대개 주석 함량이 15% 정도인 구리제품이었다. 히포크라테스의 저서에서도 수술 칼이 강철로 만들어졌다는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 이밖에도 ‘은’으로 만든 ‘내장용 침’ 등 정교한 의료기구들도 발견되었다.

이처럼 정교한 외과용 수술도구는 경험이 풍부한 전문 장인들이 금속을 이용해 만든 것으로 손잡이 부분까지 화려한 장식을 하는 등 수준 높은 기술을 보여주고 있다. 산과의 겸자(鉗子: 난산 때 태아를 끄집어내는 도구), 내시경 등의 기구는 육안으로 볼 수 없는 기관을 진찰하거나 치료하는데 사용되었다. 이밖에도 소식자(消息子: 진단이나 치료를 위하여 장기 조직 속에 삽입하는 대롱 모양의 기구), 스푼, 스크레이퍼(scraper: 기계로 깎거나 줄질한 면을 다시 정밀하게 다듬는 데에 쓰는 칼), 외날 또는 쌍날 메스, 날이 굽은 메스, 핀셋, 갈고리 또는 파이프 형태의 기구, 바늘, 의료용 톱, 의료용 드릴, 의료용 끌, 절구와 절구공이 모양의 연고용 도구 등이 있다. 당시 의사들은 질병이 더 이상 귀신의 조화가 아니라 일종의 자연현상이었음을 인식했던 것이다. 따라서 합리적인 의학 체계가 형성될 수 있었다.

지혜를 숭상했던 그리스인들은 지혜의 여신 아테네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여신이라고 생각했다. 지혜는 진리를 추구하는 최고의 원동력이었다.

그들은 표면적인 문제에 계속 얽매여 있기보다는 문제의 본질을 추구하여 완벽한 이성 체계를 확립하고자 했다. 그리스만큼 수많은 철학가와 성현을 배출한 나라도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끊임없는 사색과 연구에 매진했던 이들은 우주를 신의 작품이라고만 생각할 수 없었다. 이들은 철학적 관점에서 우주의 본질과 기원을 밝혀내려 했다. 당시 철학자들은 수학, 천문학, 지리학을 연구하는 과학자의 신분이기도 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탈레스(Thales)는 세계의 본질이 ‘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생명의 근원은 물이며 물에서 만물이 기원했으며 물이 모든 물질의 기반이라고 여겼다. 아낙시메네스(Anaximenes)는 주변에 가득한 공기가 우주의 근본이라고 생각했으며 헤라클레이토스(Heraclitus)는 활활 타오르는 불꽃 속에서 해답을 찾고자 했다. 그는 “이 세계에는 하나의 신만이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어떤 한 신이 세상을 만든 것도 아니다.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도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과 같은 존재이다.”라고 말했다.

고대 그리스의 자연 철학자였던 데모크리토스는 우주의 본질은 정신이나 영혼이 아니라 물질이라고 강조했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물질은 지극히 작은 원자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원자들이 끊임없이 운동하면서 결합과 분리를 반복한다. 데모크리토스의 이론은 에피쿠로스에 의해 의학에 원용되었다. 에피쿠로스는 인체도 원자와 원자가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형성되었다고 생각했다. 원자가 순조롭게 운행될 때에 인체는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지만 일단 운행에 장애가 생기기 시작하면 병을 얻게 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의사의 직분은 원자와 원자 사이의 공간을 깨끗하게 유지하여 정상적인 운행을 보장해 주는 것이었다. 데모크리토스가 의사는 아니었지만 인체해부, 유행성 질병, 병의 경과, 음식과 관련된 수많은 저서를 남겼다. 당시 데모크리토스를 포함한 이오니아학파 철학자들은 이성적으로 의학을 연구했다. 데모크리토스는 질병도 우주와 마찬가지로 일정한 법칙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한편,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는 소아시아로 이주한 후부터 생물학 연구에 심취했다. 그의 저서 《자연학》에는 생명의 발생과 유전에 대한 내용이 소개되어 있는데 다윈의 ‘진화론’과 같은 관점이라고 볼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고대 과학을 집대성하여 후대 생물학 발전에 기초를 마련했다. 그는 인체해부를 시도한 적은 없지만 수많은 동물의 시체를 해부해본 경험이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동물의 내장과 기관을 상세하게 기록한 최초의 해부도를 남겼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사용한 ‘자궁’이란 영문 명칭은 지금까지도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그도 동맥과 정맥을 구별하지 못했으며 감각기관, 신경, 뇌수 간의 관계에 대해서는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특히 뇌 대신 심장을 모든 감각을 인지하는 중요 감각기관으로 생각했다. 뇌는 심장이 열이 날 때만 이를 냉각시켜주는 작용을 한다고 여겼다.

그는 발생학(Embryology: 생물의 개체발생을 연구하는 학문)에도 깊은 관심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발생학을 기반으로 생태학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특히 계란의 부화과정을 관찰해 3일 만에 부화가 일어난다는 것을 발견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신과 영혼의 존재 여부에 따라 생물과 무생물을 구별했다. 생명은 ‘스스로 영양을 흡수해 스스로 성장하며 스스로 사망에 이르는 힘’이라고 정의했다. 또한 생명의 중요 요소로 가장 낮은 수준에 해당하는 영양과 번식, 그 다음으로 감각, 마지막은 최고의 수준에 해당하는 지혜와 정신 등 세 가지를 들었다.

철학자들의 풍부한 사색을 바탕으로 원시 의학은 ‘신앙에서 과학’으로 바뀌는 큰 전환기를 맞게 되었다. 특히 의학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를 비롯해 의약을 다각도로 연구한 셀수스(Celsus)와 플리니우스(Plinius), 산부인과의 창시자 소라누스(Soranus), 갈레노스(Galenus) 등의 영향으로 의술과 의학 이론은 전성기를 맞이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의학은 철학과 함께 발전하였으며 과학과 예술의 영역까지 아우르게 되었다. 특히 우주의 법칙을 인체에 원용하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피타고라스는 숫자의 법칙이 우주를 지배한다고 생각했다. 마치 독자적인 선율을 가진 오르간의 서로 다른 건반들이 리드미컬한 화음을 만들어 내는 것처럼 우주의 별들도 일정한 법칙에 따라 조화롭게 천체를 운행하고 있다고 여겼다. 그는 인체를 리듬과 수치 관계로 풀이했다. 따라서 질병은 인체의 리듬과 수치의 부조화로 발생한다고 생각했다. 의사는 이러한 부조화를 다시 본래의 조화 상태로 되돌려 놓는 역할을 담당한다고 믿었다. 히포크라테스는 피타고라스의 개념을 의학에 도입해 인체의 부조화 상태가 생명에 위협을 끼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피타고라스학파에는 기이한 규정이 매우 많았다. 콩을 먹지 않는다, 떨어뜨린 물건은 집지 않는다, 흰 공작새를 만지지 않는다, 식빵을 통째로 먹지 않는다 등이 모두 이에 속했다. 이러한 규정들은 제자들의 식습관을 엄격하게 규제함으로써 건강에 도움을 주기도 했다. 이들은 모두 독신주의를 맹세해야 했으며 인체의 균형을 파괴하지 않기 위해 큰 소리로 웃는 것도 금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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