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고금 의술이야기] 전쟁과 함께 발전한 의학
[동서고금 의술이야기] 전쟁과 함께 발전한 의학
  • 강선주, 이문필 등 20인(빅북 제공)
  • 승인 2018.11.21 0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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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고대 그리스 의학 — 찬란한 이성의 빛

한 국왕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면역학의 원칙을 세워 세계 최초의 면역학자가 된 사례가 있었다. 폰투스의 국왕 에우파토르(Eupator, BC 132~ 63)는 계속된 궁중 암투 속에서 항상 암살의 두려움에 떨며 살았다. 어느 날 그는 독약에 강한 약재를 발견했는데 죄수에게 먼저 실험을 해보니 과연 효과가 있었다. 얼떨결에 독약 연구의 권위자가 된 그의 이름이 서방 해독제로 명명되기도 했다. ‘테리아카(theriaca)’라고 불리는 이 항독제는 당시 만병통치약으로 여겨졌으며 개량을 거듭하는 과정에서 64종의 약재가 결합된 형태로 발전했다. 곧 모든 약방에서 이 약을 팔기 시작했으며 특히 농민들에게 큰 환영을 받았다. 항상 논밭에서 일해야 하는 그들은 뱀과 곤충에 물리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약방에 테리아카가 떨어지기라도 하면 농민들의 분노가 이만저만한 게 아니었다. 기원전 215년 호메로스와 동시대 인물이었던 니칸데르(Nicander)는 그리스의 유명한 의사이자 시인이었으며 약초에도 정통했다. 그가 지은 시에는 신이나 영웅 대신 뱀에 물린 사건과 뱀에 물린 상처를 치료한 ‘테리아카’가 등장하고 있다.

기원전 6세기경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병 그림에는 세르니 섬의 국왕이 당시 만병통치약이라고 불렸던 실피움(silphium)을 선박에 싣도록 명하는 장면이 나온다. 삼엄한 감시 속에서 포대에 담긴 실피움이 배의 갑판 위로 옮겨지고 있었다. 실피움은 세르니 섬에서만 나는 식물로 지중해 연안의 수많은 국가에 팔리면서 세르니 섬에 큰 부를 안겨 주었다. 이 식물의 모양은 세르니 섬의 모든 화폐에 새겨져 있다.

서기 79년 베스비우스 화산 폭발로 숨진 로마의 대작가 플리니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의사들은 신경계통의 질병과 기침, 쉰 목, 흉부 측면 통증, 식욕부진, 소화불량 등의 증상 치료에 이 약을 썼으며 연령이 비교적 많은 사람들에게 이 약을 처방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의 한 야만족이 세르니 섬을 침략해 이 식물을 멸종시켰다. 그 후 실피움은 세상에서 사라졌으며 지금까지도 어떤 식물이 실피움인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점점 부흥하면서 해외 식민지를 확대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리스의 의학도 그 영향력이 점차 확산되어 약재 무역이 황금 무역을 능가할 정도였다. 그러나 당시의 의사들이 모두 히포크라테스와 같은 입지에 있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호메로스시대부터 그리스 의사들의 지위는 구두공이나 도자기공과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그리스 의사들의 각종 치료 장면이는 향수병 위에 그려진 그림으로 중앙 부분에 의사가 환자의 팔에 방혈치료법을 시행한 후 마무리 처리를 하고 있는 장면을 볼 수 있다.
그리스 의사들의 각종 치료 장면이는 향수병 위에 그려진 그림으로 중앙 부분에 의사가 환자의 팔에 방혈치료법을 시행한 후 마무리 처리를 하고 있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오직 히포크라테스만이 이름난 명의로서 그 명성을 떨쳤으며 왕궁의 어의 자리에 올랐던 것이다. 그러나 다수의 보통 의사들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각지를 돌아다니며 환자를 찾아 나서야 했다. 시장이나 마을의 임시 거처에서 작은 임시 간판을 내걸고 의료행위를 했으며 생계를 위해 ‘고객’을 속이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이에 대해 히포크라테스는 “의사가 잘못된 의료행위를 해도 오명을 얻는 것 외에 다른 처벌을 받지 않았다. 이렇게 습관이 되어버린 사람은 오명을 얻고서도 부끄러운 줄도 몰랐다.”라고 개탄하기도 했었다.

의사들은 점술이나 마술로 환자를 끌기도 했는데 히포크라테스도 이러한 문제를 이미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학생들에게 의사가 환자에게 병의 원인, 증상, 진행과정 등을 설명해줄 수 있다면 환자가 저절로 의사를 찾아오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몇 가지 문진을 통해 환자의 증세를 집어낼 수 있다면 환자는 의사의 관찰력을 신뢰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의사를 꿈꾸는 수많은 그리스 청년들이 히포크라테스 문하로 모여들었지만 이러한 문제들이 근본적으로 해결되지는 못했다.

당시에는 상설 진료소를 가진 의사들이 거의 없었다. 히포크라테스는 의사들에게 상설 진료소를 건립할 것을 제의했다. 진료소 안에는 의자, 청결한 수건과 이불 등을 구비해 놓고 환자의 눈을 자극하지 않는 범위에서 조명을 최대한 밝게 해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입에 겨우 풀칠을 면할 정도로 가난한 의사들에게 히포크라테스의 말은 한낱 꿈에 불과했다. 더구나 그들은 환자들의 위생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었던 것이다. 심지어 델파이 지역의 의사들은 시약소(施藥所, dispensary 일종의 무료 진료소) 유지 명목으로 별도의 세금까지 내야 했다.

이러한 문제를 인식한 그리스 지방정부는 일부 마을에 시범적으로 공공 종합병원을 건립했다. 병원의 위생을 담당할 관리는 주민들이 직접 선출하도록 했다. 이 제도의 성공 여부는 현재로서는 알 도리가 없다. 다만 일부 역사 문헌에서 기원전 3세기경 전염병을 연구했던 한 의사가 아테네 시민을 잘 섬겼다는 이유로 푸른 올리브 관을 받았다는 내용을 확인해 볼 수 있다. 병원 위생을 담당했던 관리 중에는 올림픽 경기의 영구 좌석을 부여받은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정부지원으로 진료소 외에 약국도 등장했다. 그리스어로 ‘Pantopoli’는 전문적으로 약을 조제했던 곳을 가리키는 말로 약국의 기원에 해당한다. 약을 조제하는 전문 약사들도 선보이기 시작했다. 그리스어로 ‘Rhizotomi’는 약초 캐는 사람을 뜻하며 ‘Pharmakotribae’는 약초를 갈아 약을 만드는 사람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들로부터 약사가 유래했다고 볼 수 있다.

서양 식물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테오프라스투스(Theophrastus, BC370~285)는 수많은 약용식물을 연구한 인물로 그의 저서 《식물문답록 Inquiryinto Plants》은 약용식물의 교과서로 자리매김했다. 이 책에 “박하 꽃은 여성이 분만할 때 주로 사용했다. 박하 꽃은 분만을 도와주고 통증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었다.”라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마취제에 대해 초보적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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