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고대 그리스 의학 — 찬란한 이성의 빛

기원전 4세기 말엽 마케도니아 왕국의 필리포스 왕이 죽은 후 그의 아들 알렉산더(Alexander, BC 356~323)가 왕위를 계승했다. 알렉산더는 두 차례에 걸쳐 아시아, 페르시아, 이집트 등지에 원정을 실시해 의학을 포함한 그리스문명과 다른 나라 문명의 융합을 이룸으로써 헬레니즘 문화의 문을 열었다.

알렉산더 대왕은 젊은 시절 마케도니아에 머물고 있던 아리스토텔레스를 스승으로 모신 적도 있었다. 그는 원정길에 대규모 자연과학 연구팀을 구성해 각지의 다양한 생물체 견본을 채집하고 의료, 미용에 효능이 있는 특수한 약초는 그 용도를 상세하게 보고하도록 했다. 또한 각양각색의 동식물 표본을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가져다주기도 했다. 그리스 문명에는 수많은 지식이 공존했지만 상호 관련성을 찾기 어려웠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논리를 적용해 이러한 지식들을 하나하나 체계화시키기 시작했다.

바빌론, 시리아, 인도, 이스라엘의 의학기술과 지식도 하나로 융합되었는데 이는 그리스 문명의 가장 큰 특징 가운데 하나로 꼽을 수 있다.

기원전 324년 알렉산더 대왕이 세상을 떠나기 1년 전, 나일 강 삼각주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불후의 왕국을 기념하기 위해 이곳에 새로운 수도 ‘알렉산드리아’ 성을 세웠다. 이곳은 향후 세계의 중심도시로 발전했다.

인구 60만의 이 새로운 도시에서 가장 주목받은 것은 70만 권의 책을 소장한 도서관이었다. 특히 그리스 철학자 프톨레마이오스(Ptolemaeus)는 《히포크라테스 전집》을 포함해 각종 서적을 두루 수집한 것으로 유명했다. 알렉산드리아 성은 연구와 학문의 중심지이자 대형 박물관으로 발전했다. 수학자 유클리드는 이곳에서 기하의 개념을 정립했으며 히파르코스는 천문학을 발견했다. 또한 아르키메데스(Archimedes)는 역학을 발전시키는 데 더욱 매진했다. 새로운 과학의 등장은 의학의 관찰, 측량 분야 발전을 더욱 가속화시켰다.

기원전 300년경 알렉산드리아 성에 실험실, 도서관, 임상실을 겸비한 의학교가 건립되었다. 포톨레미가 이곳에서 사형수를 해부학 실험용으로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집트에는 시체를 방부 처리하는 전통이 있었으므로 이러한 제반 여건을 바탕으로 알렉산드리아에서는 해부학이 발전하게 되었다. 의학자들은 수없이 많은 인체해부를 진행하면서 인체의 신비를 하나씩 벗겨가기 시작했다. 이 부분은 히포크라테스도 소홀히 다루었던 부분이었다. 알렉산드리아는 명실상부한 해부, 생리학의 요람으로 거듭났다. 광적인 해부학자들은 인체의 자연적인 반응을 관찰하기 위해 600여 명의 사형수를 산 채로 해부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특히 해부학의 창시자로 불리는 헤로필로스(Herophilus)는 실험을 통해 지혜가 심장에서 나온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설을 반박하고 지혜는 뇌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그는 또한 혈액의 흐름을 관찰해 동맥과 정맥의 구조체계를 밝혀냈다.

헤로필로스는 그 시대 가장 유명했던 의사 가운데 한 명이었다. 해부학의 창시자로 불리는 그는 이론과 실험이 수평저울의 양쪽의 추처럼 의학의 균형을 이루기를 바랐다. 그는 전통적인 의료행위에 많은 불만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해부를 통해 인체를 더욱 심오하게 이해하고자 했다. 로마의 의학자 갈레노스도 인체해부를 처음 시도한 인물로 헤로필로스를 꼽고 있다.

헤로필로스는 가장 먼저 십이지장과 전립선을 발견해 이를 명명했으며 간, 췌장, 침에 대한 연구를 시도한 인물이다. 그는 또 눈의 구조를 연구해 섬모체(纖毛體: 눈 안의 수정체를 둘러싸고 있는 근육성의 조직), 수정체, 망막, 맥락막(脈絡膜: 눈알의 뒷부분을 둘러싸고 있는 어두운 적갈색의 얇은 막) 등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또한 뇌와 척수 해부를 최초로 시도하여 감각신경과 운동신경을 분별해냈으며 신경, 대뇌, 척수의 관계를 밝혀냈다. 뇌수막, 제4뇌실 등에 관한 기록도 볼 수 있다. 아울러 당시로서는 유일하게 여성의 기관을 해부해 난소와 수란관에 대한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신경과 혈관을 최초로 구분한 사람도 헤로필로스이다. 그는 심장 박동과 맥박의 관계를 연구하기도 했는데 일종의 시계를 발명해 맥박 측정을 시도한 적도 있다. 또한 약재를 매우 중시해 약을 ‘신의 손’이라 칭하기도 했다.

당시 또 한 명의 유명한 의사로 생리학자 에라시스트라투스(Erasistratus)를 들 수 있다. 그는 서양의 영기의학(pneumatism)을 창시한 인물로 꼽힌다. 영기의학(질병의 원인을 영기에 의한 생명력의 장애라고 믿는 의학)이란 세상에 수많은 생명의 영기가 존재한다는 이론이다. ‘생명의 영기’는 호흡을 통해 인체에 유입되며 허파에서 왼쪽 심장으로 다시 동맥으로 들어가 심장박동과 체온의 원동력을 제공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인체는 이를 빌어 음식을 소화하고 영양분을 흡수한다. ‘동맥의 영기’는 뇌에서 생성되며 신경을 통해 신체 각 부위로 전달된다. 이로써 인간은 감각을 느끼고 운동을 하게 된다. 그는 새에게 모이를 주고 소화되기 전후의 체중 변화를 연구한 적이 있었다. 이는 새의 배설물을 관찰하여 유형, 무형의 영양의 흡수, 분비, 배출 과정을 알아내려는 의도였다.

그는 또한 대뇌, 소뇌, 뇌실에 대한 연구를 통해 신경을 감각신경과 운동신경으로 구분했다. 감각신경은 감각을 받아들이고 운동신경은 감각을 전달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삼첨판(三尖瓣: 심장의 우심실과 우심방 사이에 있는 판막으로 심실에서 심방으로 피가 거꾸로 흐르는 것을 막아줌)을 명명하고 심실벽과 건삭(腱索: ‘힘줄끈’이라고도 하며 심실이 수축할 때 판막이 심방 쪽으로 밀려 나가는 것을 막아줌)의 형태를 묘사해 놓기도 했다.

에라시스트라투스는 동맥과 정맥이 보이지 않는 관을 통해 서로 교통할 것이라고 추측했다. 즉 간 → 동맥 → 심장 → 허파 → 정맥의 방향으로 혈액이 순환이 이뤄질 것으로 생각했는데 실제는 이와 정반대 방향이다. 그는 질병이 인체조직과 혈관에 기인한다는 액체병리학설을 부인했다. 또한 동맥출혈을 막는 방법으로 결찰술(結紮術: 동맥류를 묶어 역류를 차단하는 방법)을 주장했지만 당시에는 주목받지 못했으며 오히려 근대에 와서야 새로운 치료방법으로 주목받았다.

그는 “콩팥이 망가지면 왜 몸 전체에 영향을 끼치는가? 우리는 콩팥의 기능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너무 많이 알고 있을 필요도 없다. 국부치료법을 이용해 상처를 입은 부위부터 치료하면 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그의 이 이론에 근거해 간 기능에 이상이 있는 환자에게 절개수술을 실시하기도 했다. 그의 이론은 질병의 원인을 중시하지 않는 대신 치료방법을 강조하는 ‘방법론학파’를 형성했다.

헤로필로스는 히포크라테스학파로 불려졌다. 그는 환자의 몸 전체에서 나타나는 증상에 주의를 기울여 증상에 맞는 치료를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히포크라테스의 교의를 엄격히 준수했으므로 그는 후에 ‘교조주의학파’의 영수가 되었다.

알렉산드리아에는 당시 수많은 과학자와 의학자가 모여들었는데 젊은 의사가 가장 빨리 성공하려면 알렉산드리아의 학교에서 수학해야 할 정도였다. 특히 생리학과 해부학은 알렉산드리아의 학교만큼 선진이론과 지식을 구비한 곳이 없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졸업증서가 없었으므로 알렉산드리아를 사칭한 수많은 돌팔이 의사들이 나오게 되었다.

실험의학의 전성기는 매우 짧았다. 이후에는 임상 관찰 대신 수많은 학파의 논쟁이 난무하기 시작했다. 히포크라테스학파는 교조주의, 경험주의, 방법론, 성령론(聖靈論) 등으로 갈라졌다. 이들은 점점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얽히면서, 자신이 주장하는 이론을 증명하기 위해 연구를 하는 어이없는 상황으로까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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