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진호 한국미래기술 회장이 웹하드 업체 '위디스크' 직원을 폭행하는 장면. 사진=뉴스타파 홈페이지 갈무리
양진호 한국미래기술 회장이 웹하드 업체 '위디스크' 직원을 폭행하는 장면. 사진=뉴스타파 홈페이지 갈무리

[뉴스로드] “회사에서는 마감처리를 앞두고 3~5일 정도 여유를 두는데 A부장은 항상 하루 만에 해달라고 해요. 이런 일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B팀장님은 왜 하는지 모르는 일들을 많이 시키세요. 보통 퇴근 10분 전에 업무요청을 하셔서 오늘 해결이 어려우니 내일 처리하겠다고 말씀드리면 왜 퇴근을 하냐고 눈치를 주는 거죠”

“C이사가 저와 가까운 사람들을 불러 저와 연락을 하냐, 어떤 일을 시켰냐, 제가 비리를 저질러 회사에서 퇴출될 예정이다, 이렇게 주입을 시키니까… 직원들도 저와 가까이 지내면 안되겠다고 생각하게 된 거죠”

위 발언은 고용노동부가 지난해 11월 발표한 ‘직장 내 괴롭힘 대책 마련을 위한 실태조사’에 나타난 직장 내 괴롭힘 피해자들의 증언이다. 최근 양진호 한국미래기술 회장의 엽기적인 행각으로 인해 직장 내 괴롭힘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증가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 직장 내 괴롭힘 피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양 회장과 같은 괴팍하고 극단적인 가해 행위보다는 따돌림, 과다 업무, 눈치주기 등 암묵적이고 일상적인 형태의 가해가 주를 이루고 있다.

◇ 직장인들의 ‘학습된 무기력’, 괴롭힘 당해도 왕따 두려워 침묵

한국노동연구원 2017년 3월 발표한 ‘직장 내 괴롭힘 실태와 제도적 규율 방안’에 따르면 전국 직장인 2500명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지난 5년간 직장 내 괴롭힘을 경험했다고 응답한 비율에 66.3%였으며, 두 차례 이상 당했다고 응답한 경우는 37.4%로 사내 폭력이 일회성에 그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피해자들이 당한 괴롭힘 중 가장 많은 빈도로 나타났던 것은 협박·모욕 등의 정신적인 공격(24.7%), 불필요하거나 실행 불가능한 업무의 강제(20.8%), 직장 내 따돌림(16.1%) 등이었다.

직장 내 괴롭힘의 가장 큰 문제는 직장 내에 자체적으로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창구가 없다는 것이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 중 40.1%는 사내에 괴롭힘 관련 상담창구가 설치돼있지 않다고 답했으며, 14.5%는 아예 상담창구의 존재 여부를 모르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절반 이상의 직장에서 공식적인 해결 창구 없이 직장 내 괴롭힘을 방치하고 있는 셈이다. 노동조합이 있다고 응답한 1646명중 46.4%는 노동조합에서 직장 내 괴롭힘 관련 상담 지원을 받고 있다고 답했지만, 역시 절반 이상이 노조의 도움을 받지 못하거나 노조의 지원 여부조차 알지 못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괴롭힘 유형 중 가장 빈도가 높았던 정신적인 괴롭힘으 경우 사측에서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고 방치하는 경우가 더 높았다. 피해자 중 48.3%는 사측에서 피해 사실을 인지한 후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고 밝혔으며, 22.2%는 아예 피해 사실조차 몰랐다고 응답했다. 피해 사실이 인정된 이후에도 가해자에 대한 징계처분(17.0%)이나 배치전환(15.1%) 등 실질적인 조치가 취해진 경우는 5건 중 1건도 채 안됐다.

가해자들도 자신의 행동이 괴롭힘이라고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가해 경험이 있다고 응답한 684명 중 자신이 상대를 괴롭히고 있다고 인지하지 못한 경우는 42.7%로, 절반에 가까운 가해자가 자신의 행동을 폭력이라고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들 중 회사로부터 징계, 배치전환, 휴직, 연수 등 실질적인 조치를 지시받은 경우는 34.9%, 아무런 조치도 없었던 경우는 34.5%로 비슷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직장 내 괴롭힘의 피해자들에게는 ‘학습된 무기력’에 가까운 태도도 나타났다. 직장 내 괴롭힘 피해자 중 상담을 경험한 비율은 33.3%에 불과했다. 다양한 괴롭힘 유형의 피해자가 밝힌 상담을 하지 않은 이유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무엇을 해도 해결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직장 상사 및 동료와의 관계 악화를 우려해서”였다. 사내에서 사태가 해결될 가능성도 높지 않고, 문제제기를 할 경우 오히려 직장 내 따돌림을 당할 수 있다는 공포가 피해자들로 하여금 섣불리 해결을 요구할 수 없도록 입막음을 하는 셈이다.

◇ 국회에 막힌 ‘양진호 방지법’, 시급한 처리 절실해

사내에서 직장 내 괴롭힘이 발생하지 못하도록 자체적인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최선이겠지만, 아직 상담창구조차 없는 기업이 많은데다 수십 년간 이어진 직장 내 폭력 문제를 기업의 자구책에 맡겨두자는 것은 무책임한 발상이다. 구체적인 입법을 통해 직장 내 폭력을 명확하게 규정하고 근절하기 위한 노력이 시급하다.

첫 단추는 직장 내 괴롭힘을 명확하게 정의하는 것이다. 프랑스의 경우 지난 2002년 정신적 괴롭힘에 대한 규정을 노동법·형법에 도입하고 처벌 근거를 명확히 했다. 프랑스 노동법에서는 “모든 노동자는 자신의 권리와 존엄을 침해하거나 신체·정신적 건강을 훼손하고 직업적 장래를 위태롭게 하며, 근로조건의 훼손을 목적으로 하거나 그러한 결과를 초래하는 반복되는 정신적 괴롭힘 행위들을 겪어서는 안 된다”고 명시하고 있다. 프랑스는 법적으로 사측에도 정신적 괴롭힘 예방 의무를 부과하고, 사태가 중할 경우 형사처벌까지 가능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캐나다 또한 성가시고 반복적·적대적이며, 근로자의 존엄성을 침해하고 근무환경을 악화시키는 행위를 정신적 괴롭힘으로 규정하고 사측이 이를 막기 위한 합리적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정신적 괴롭힘의 피해자가 피해시점으로부터 90일 이내에 노동기준위원회에 구제를 신청하면 조사 결과에 따라 직장 복귀, 보상금, 가해자 징계, 정신적 지원 등의 처분이 내려진다.

반면 국내에서는 아직 직장 내 괴롭힘에 대한 명확한 규정조차 부족하다. 국내법 중에는 근로기준법, 장애인차별금지법, 양성평등기본법, 남녀고용평등법, 국가인권위원회법 등에 다양한 방식으로 직장 내 괴롭힘이 언급돼있지만 서로 동일한 의미를 가지는 것인지 정리가 되지 않은 상태다. 또한 신체적 공격이나 성희롱처럼 비교적 의미가 명확한 경우와 달리 정신적 괴롭힘, 또는 스트레스의 경우 현행법에서 이를 직장 내 폭력으로 해석하고 사측에 강제적으로 예방의무를 부과하기 어렵다.

그나마 지난 9월 직장 내 괴롭힘 방지를 위한 근로기준법 개정안이 국회 환경노동위원회를 통과했지만, 여전히 법제사법위원회에서 발목이 잡혀 계류 중이다. 일부 야당 의원들이 ‘정서적 고통’, ‘업무환경’ 등의 범위가 모호하다며 해당 법안의 통과를 반대했기 때문.

반면 직장갑질119는 “자유한국당 이완영, 장제원 의원의 훼방으로 (개정안이) 국회 법사위에서 잠들어 있다”며 “오늘도 직장인들은 상사의 갑질로 만신창이가 되고 있는데 적폐 1번지 국회가 직장인들 가슴에 대못을 박고 있다”고 야당 의원들을 비난했다. 양진호 사태로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에 대한 여론의 요구에 직면한 법사위가 유연한 태도를 보여줄 수 있을지 관심이 집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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