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은의 오장환문학관

나의 노래가 끝나는 날은/ 내 가슴에 아름다운 꽃이 피리라// 새로운 묘에는/ 옛 흙이 향그러// 단 한 번/ 나는 울지도 않았다// 새야 새 중에도 종다리야/ 화살같이 날아가거라// 나의 슬픔은/ 오직 님을 향하여// 나의 과녁은 오직 님을 향하여// 단 한 번/ 기꺼운 적도 없더란다// 슬피 바래는 마음만이/ 그를 좇아/ 내 노래는 벗과 함께 느끼었노라// 나의 노래가 끝나는 날은/ 내 무덤에 아름다운 꽃이 피리라 -오장환 ‘나의 노래’ 전문

오장환문학관 앞에 세워진 ‘나의 노래’ 시비. “‘나의 노래’ 는 그의 나르시스적 심정이 그다지 꾸밈없이 드러나고 있다. 그렇다 해서 어디 하나 영웅적으로 비장할 것도 없다. 정작 전설적인 시인의 이름이 그의 시보다 더 무겁다. ‘내 가슴’ 과 ‘내 무덤’에 필 ‘아름다운 꽃’이란 무엇일까.”(고은) ⓒ오장환문학관
오장환문학관 앞에 세워진 ‘나의 노래’ 시비. “‘나의 노래’ 는 그의 나르시스적 심정이 그다지 꾸밈없이 드러나고 있다. 그렇다 해서 어디 하나 영웅적으로 비장할 것도 없다. 정작 전설적인 시인의 이름이 그의 시보다 더 무겁다. ‘내 가슴’ 과 ‘내 무덤’에 필 ‘아름다운 꽃’이란 무엇일까.”(고은) ⓒ오장환문학관

1988년 들어 광복 후 40여 년간 논의조차 불가능했던 월북문인에 대한 해금조치가 이루어졌다. 그 뒤부터 오장환(1918~1951)의 문학세계에 대한 연구논문을 비롯하여 전집, 평론, 시집 등이 발간되었으며, 초창기의 시와 동시, 장편시 등의 자료들이 속속 발굴되었다. 그보다 앞서 1966년에는 제1회 오장환문학제가 개최되어 현재까지 매년 기념행사가 진행되고 있으며, 2005년 오장환의 생가 복원 및 문학관 건립을 위한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렇게 해서 시인은 비로소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그가 그토록 오랫동안 우리의 뇌리에서 잊혀 있었던 것은 순전히 ‘월북시인’이라는 족쇄 때문이었다. 기실 오장환은 1930년대부터 해방을 거쳐 분단으로 이어지는 우리 역사의 격동기에 가장 왕성하게 작품활동을 한 시인 중의 한 사람으로 서정주, 이용악과 함께 ‘시단의 3천재’로 불리었다. 시집 <성벽>과 <헌사>를 내놓았을 때는 ‘시단에 새로운 왕이 나왔다’는 찬사를 듣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는 해방 후 많은 지식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사상의 문제로 치열한 고민을 했고,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리던 시기에는 전국을 돌며 몸을 아끼지 않는 활발한 활동을 벌인다. 그러나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고 문화예술인들에 대한 테러가 자행되면서 몸을 심하게 다친 끝에 북으로 가게 된다. 이후 북한과 소련을 오가며 지병을 치료하던 그는 소련기행시집 <붉은 기>를 마지막으로 발표하고 한국전쟁의 와중에서 병사하고 만다.

아슬한 참으로 아슬한 곳에서 쇠북소리 울린다./ 죽은 이로 하여금/ 죽은 이를 묻게 하라. -오장환 ‘성탄제’ 중에서

2006년 개관한 충북 보은군 회인면 중앙리의 오장환문학관은 전시실, 영상실, 문학사랑방, 생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매년 10월이면 이곳에서 오장환문학제가 열린다. ⓒ오장환문학관
2006년 개관한 충북 보은군 회인면 중앙리의 오장환문학관은 전시실, 영상실, 문학사랑방, 생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매년 10월이면 이곳에서 오장환문학제가 열린다. ⓒ오장환문학관

그가 처음 시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도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면서 나중에 같은 ‘월북시인’ 처지였던 정지용을 만나 시를 배우면서였다는 사실은 애틋함을 더한다. 어쩌면 그는 비운의 역사 속에서도 항상 어머니와 고향을 그리워하고, 조국의 현실을 아파하며 희망적인 미래를 갈망했던 그저 순수하기만 한 한 사람의 청년이었는지도 모른다. 길거리에 버려진 조개껍질을 귀에 대고도 파도소리를 듣는 감수성을 지닌.

‘그는 시인이다’와 ‘그는 인간이다’ 하는 둘 가운데 어느 것이 되겠느냐고 묻는다면 서슴지 않고 나는 ‘인간이 되겠다’라고 맹세할 것이고, 또 참다운 인간이 되려 노력할 게다. 시라든가 노래 혹은 춤 이러한 것은 우리 인생에서 뗄 수 없는 생활에의 한 태도이나 또한 그 이상의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 나는 정상한 인간의 행로 가운데 문학의 길을 밟으려 한다. -오장환 ‘문단의 파괴와 참다운 신문학’ 중에서

그의 시들이 해금되고 문학관이 지어지고 생가가 복원되었다 해서 그의 노래가 완전히 자유로워진 것은 아니리라. 여전히 세상은 어둡기만 하며, 가끔은 ‘술거리로 나아가 무지한 놈에게 뺨을 맞기도’ 하는 것이다. 노래는 끝이 났어도 무덤 곁에 꽃 한 송이 피지 않기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생가터에서 듣는 ‘어둔 밤의 노래’는 더욱 절절하다.

나의 불러온/ 모든 노래여!/ 새로운 우리들의 노래는 어디에 있느냐

문의문화재단지의 문산관. 문의마을은 고은의 시 ‘문의마을에 가서’의 배경이기도 하다. 시인은 지금 어디에 가 있을까. ⓒ유성문
문의문화재단지의 문산관. 문의마을은 고은의 시 ‘문의마을에 가서’의 배경이기도 하다. 시인은 지금 어디에 가 있을까. ⓒ유성문

오장환문학관 찾아가는 길은 경부고속도로 남이분기점에서 당진-상주간 고속도로로 갈아타고 회인IC에서 빠지면 곧장이지만, 조금 시간의 여유가 있다면 문의IC에서 내려 대청호반의 문의마을 쯤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다. 그래야만 잃어버린 고향의 서정을 되새길 수 있으니까. 문의마을에는 충주호의 청풍문화재단지처럼 대청호 수몰지구에서 거둬들인 문화재들의 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또한 이곳은 대통령 별장으로 쓰이다가 2003년 시민의 품으로 돌아온 청남대로 가는 기점이 된다. 청남대에서는 11월 11일까지 가을국화축제가 열린다.

문학관을 둘러본 후에는 보은의 진산 속리산 쪽으로 길을 잡는다. 삼년산성과 말티재, 정이품송, 법주사로 굽이치는 속리의 속길도 좋고, 장각폭포, 견훤산성, 용송으로 이어지는 속리의 뒷길도 좋지만, 빠트리지 말고 꼭 들려야 할 곳이 있다. 정이품송과 짝이라는 서원리 소나무 가까이에 있는 선병국고가다.

선병국고가(중요민속자료 제134호)는 조선 후기 전남 고흥을 본향으로 일대 치부를 이룬 보성 선씨 가문이 명당을 찾아 세웠다는, 이 땅에 남아있는 개인주택 중 가장 큰 규모의 고택이다. ‘위선최락(爲善最樂)’을 가풍으로 삼았던 이 집 주인은 99칸으로도 모자라 33칸을 덧대어 관선정을 열고 방방곡곡의 유능한 수재들을 모아 가르쳤다. 그러한 전통은 지금껏 이어져 전국 고시생들에게 학숙으로 제공되기도 한다.

선병국고가의 지붕마루. 어느 해인가 이 집 씨간장을 부어 만든 덧간장 1ℓ가 ‘350년 묵은 간장’이라 하여 한국골동식품예술전에 초대되었다가, 한 대기업 회장집에 5백만원에 팔려나가 세간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유성문
선병국고가의 지붕마루. 어느 해인가 이 집 씨간장을 부어 만든 덧간장 1ℓ가 ‘350년 묵은 간장’이라 하여 한국골동식품예술전에 초대되었다가, 한 대기업 회장집에 5백만원에 팔려나가 세간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유성문

 

<필자 약력>

-여행작가

-편집회사 투레 대표

-한국기록문화연구협동조합 이사

-<문향을 따라가다>(어문각) 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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