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고금 의술이야기] 현대의학의 아버지 갈레노스
[동서고금 의술이야기] 현대의학의 아버지 갈레노스
  • 강선주, 이문필 등 20인(빅북 제공)
  • 승인 2018.12.05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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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고대 로마 의학 — 고대 제국 최후의 전성기

에게 해변에 위치한 페르가몬은 아스클레피오스 신전과 도서관으로 유명한 곳이다. 페르가몬 문화를 시기한 프톨레미 왕조(알렉산더제국이 멸망한 후 분열된 세력이 이집트 지역을 중심으로 발전한 국가)는 당시 종이 역할을 했던 파피루스의 수출을 금지했다. 그러자 페르가몬에서는 파피루스 대신 양가죽을 사용해 서책을 만들기 시작했다.

현대 의학의 아버지 갈레노스. 고대 서양의 의학을 집대성하고 체액설 등 의학의 원리를 체계화한 사람으로서 해부학과 생리학에 조예가 깊었다. 그의 영향력은 의학의 암흑시대인 중세 초기를 제외하면 ‘의학의 황제’로 군림하였다. 그러나 인체해부학에 기반을 둔 해부병리학이 확립되자 기존의 체액설을 핵심원리로 하는 고대 서양 의학은 설 자리를 잃었다.
현대 의학의 아버지 갈레노스. 고대 서양의 의학을 집대성하고 체액설 등 의학의 원리를 체계화한 사람으로서 해부학과 생리학에 조예가 깊었다. 그의 영향력은 의학의 암흑시대인 중세 초기를 제외하면 ‘의학의 황제’로 군림하였다. 그러나 인체해부학에 기반을 둔 해부병리학이 확립되자 기존의 체액설을 핵심원리로 하는 고대 서양 의학은 설 자리를 잃었다.

로마의 위대한 의사 갈레노스는 바이 페르가몬 출신이었다. ‘갈레노스’란 이름은 ‘쉬지 않고 밀려오는 파도’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의 부친 니콘(Nicon)은 인자한 성품의 건축가였으나 모친은 히스테릭하고 괴팍한 성격의 소유자로 화가 나면 옆에 있는 하인을 물기까지 했다. 하루는 니콘이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서 의학의 신 아스클레피오스가 나타나 그의 아들이 천부적인 의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페르가몬의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에는 ‘꿈 치료’를 받기 위해 수많은 환자들이 밀려들었으므로 의학도들에게 수많은 임상자료를 제공했다. 갈레노스는 부친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고 열세 살에 벌써 세 권의 책을 냈다. 그러나 그의 문장은 지나치게 긴 경향이 있었다. 그가 쓴 히포크라테스의 저술 해설서는 원문보다도 길었다. 이러한 문체를 싫어하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그의 저서를 읽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스스로 천재라 자부했던 갈레노스는 총 300여 편의 작품을 남겼다. 그는 고대부터 의학계에서 쟁론이 끊이지 않았던 이론과 관념을 일목요연하게 체계화했다. 그의 작품 가운데 118편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으며 거대한 서책으로 18권에 이른다.

갈레노스는 농업, 건축업, 천문학, 점성학, 철학 등에 흥미를 느꼈는데 후에는 의학에 모든 정열을 쏟았다. 그는 열두 명이나 되는 서기를 고용해 밤낮으로 자기 주변에서 해부 관찰 장면, 병력, 논쟁, 자서전 등을 기록하도록 했다. 이러한 저서들은 후대에 그의 일대기를 확실하게 알려주는 구실을 했다. 이는 그가 다른 의사들과 명확하게 구분되는 점이다. 자신의 저서가 몰지각한 사람들에 의해 잘못 전해지거나 자신의 저서를 사칭하는 저술이 나올까 염려했던 갈레노스는 ‘저서목록’까지 만들어 놓았다.

새로운 의학지식에 목말랐던 그는 스미르나로 의학 공부를 하러 떠났으며 스물한 살에 이미 뛰어난 의술을 보유한 의사가 되었다. 또한 히포크라테스처럼 세계 각지의 의학이 발달한 곳을 두루 다녔다. 페니키아, 팔레스타인, 크레타 섬에서 알렉산드리아까지 그의 발자취가 남아 있다. 이러한 도시를 다닐 때면 그는 짐짓 아무런 의학지식도 없는 척했다 그리고 플라톤, 에피쿠로스, 스토아, 아리스토텔레스, 디오스코리데스 학파의 학설을 공부했다. 그의 의학지식은 이미 동시대 다른 인물들을 초월하고 있었다.

초기의 갈레노스는 과학자, 실험가, 철학자, 신학자 등의 특징을 두루 갖추었다. 신비로운 분위기가 농후했던 그 시대에 그는 이미 상당 수준 과학적인 사고를 지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후대 과학자들의 눈에 비친 갈레노스는 여전히 신비로운 인물이다.

스물여덟 살이 되었을 때 고향으로 돌아온 갈레노스는 콜로세움에서 검투사들의 상처를 돌봐주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외상 치료에 대한 풍부한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후에 ‘상처는 신체의 창’이란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갈레노스의 인체해부 장면. 갈레노스(갈렌)는 최초로 인체해부를 통한 실험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히포크라테스의 의학적 성과를 집대성하여 해부학, 생리학, 병리학에 걸쳐 방대한 의학체계를 확립하였다.
갈레노스의 인체해부 장면. 갈레노스(갈렌)는 최초로 인체해부를 통한 실험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히포크라테스의 의학적 성과를 집대성하여 해부학, 생리학, 병리학에 걸쳐 방대한 의학체계를 확립하였다.

갈레노스는 의사가 해부학 관련 지식이 결여되어서는 안 된다고 여겼다. 그러나 당시는 인체해부가 금지되던 시기였으므로 그는 하마, 코끼리 등 동물실험으로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갈레노스의 해부학 저서는 총 16권으로 동물해부를 통해 얻은 지식을 인체에 적용하는 방식을 취했다. 그는 또한 근육에 대해서도 세밀하게 연구했으며 대뇌, 신경, 혈관체계에 대해서도 매우 상세하게 묘사해 놓았다.

갈레노스는 동물실험을 통해 인후신경(오늘날 ‘갈레노스 신경’이라고도 불린다)을 절단하면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했으며 동물의 수뇨관을 묶어놓고 관찰하여 오줌이 콩팥에서 만들어진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또한 척추를 망가뜨려 불구의 원인을 밝혀내기도 했다. 갈레노스는 생전에 단 한 구의 시체밖에 해부해 보지 못했으나 해부학과 관련된 수많은 저서를 남겼다. 그는 매우 권위적인 어조로 자신의 이론을 펼쳤으나 그가 밝힌 ‘사실’ 가운데 대부분은 돼지와 원숭이의 해부 결과로 얻은 것이었다.

만약 중세의 학자들이 갈레노스의 발견을 진지하게 고증해 나갔다면 해부학은 크게 발전했을 것이다. 그러나 갈레노스의 명성은 오랜 기간 식을 줄 몰랐으며 기독교와 이슬람교 모두 인체해부를 금지했으므로 르네상스시대가 도래하기 전까지 갈레노스의 학설 가운데 잘못된 부분은 시정되지 않았다. 오히려 1559년 런던의학총회는 게인즈(Gaines)라는 회원이 갈레노스의 오류를 지적한 연구 결과를 철회하도록 요구하기도 했다. 결국 게인즈는 갈레노스와 학회에 사과성명을 냈다. 갈레노스가 틀렸다는 주장이야말로 의학계에서 가장 위험한 발상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갈레노스는 동시대의 의사들을 자주 비판했다. 그들의 얕은 지식은 자신의 이론과 치료기술에 견줄 수조차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로마의 의사들이 돈벌이에만 혈안이 되어있고 귀족들에게 아첨만 일삼는다고 꼬집었다. 별다른 기술도 없이 아첨꾼에 불과한 의사들이 로마의 돈을 끌어 모으고 있다고 비난한 것이다.

갈레노스는 약물치료도 매우 중시했는데 가짜 약을 만들어 파는 약사들을 혐오했다. 그는 약용 성분이 있는 식물이 다른 부작용을 반드시 동반한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였다. 즉 방대한 양의 식물로 알약, 가루약, 연고, 침제(浸劑: 생약의 약용 성분을 정제수 따위로 침출한 약), 탕약, 팅크(tincture: 동식물에서 얻은 약물이나 화학 물질을 에탄올 또는 에탄올과 정제수의 혼합액으로 흘러나오게 하여 만든 물약), 세척제 등 각종 약을 제조했다. 그의 약 제조법은 오늘날에도 ‘갈레노스식 제제’로 불리고 있다.

당시 로마에는 경험주의, 교조주의, 절충주의를 비롯한 수많은 의학학파가 난립하여 격렬한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환자들은 수만 가지 치료법을 두고 고민에 빠졌으며 진실로 그들의 병을 낫게 해줄 의사를 찾아 도처를 헤매었다.

갈레노스가 자신의 의술을 본격적으로 펼치기 시작한 해는 174년이다. 그때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160~180) 황제는 게르만 민족과 전쟁을 치르고 돌아온 후부터 열병에 시달리고 있었으나 의사들은 속수무책이었다. 마침내 한 귀족의 추천으로 갈레노스가 입궁하게 되었다. 그는 황제의 시종들에게 몇 가지 물어본 후 황제가 단순히 위에 탈이 난 것임을 깨달았다. 이에 감송향(甘松香: 중국의 구이저우, 쓰촨 등지에서 나는 향긋한 풀)을 넣은 따뜻한 물에 붕대를 적셔 황제의 복부에 싸맸다. 마치 지금의 더운물주머니와 같은 작용을 한 것으로 효과는 바로 나타났다.

산타마리아 대성당의 프레스코 벽화. 고대 서양 의학을 대표하는 갈레노스와 히포크라테스가 의학에 관하여 토론 중이다. 13세기에 그려진 그림이다.
산타마리아 대성당의 프레스코 벽화. 고대 서양 의학을 대표하는 갈레노스와 히포크라테스가 의학에 관하여 토론 중이다. 13세기에 그려진 그림이다.

아우렐리우스는 갈레노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고 한다. “그렇소. 당신이 말한 대로 찬 음식이 내게 맞지 않은 것 같소.” 이는 갈레노스가 시도했던 ‘반정립 이론’의 사례를 보여주는 것이다. 오한이 나는 병은 반드시 열기로 다스리고 체내에 오랜 기간 쌓인 물질은 설사약으로 배출하는 것 등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갈레노스는 식이요법, 약물요법 외에도 물리요법과 기타 보조치료법을 수없이 고안했다. 그는 자신이 고안해 낸 이러한 방법들이 특효를 낼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갈레노스는 황제가 자신을 ‘철학자’, ‘교조주의에 영향을 받지 않는 의사’라고 칭송했다고 득의양양했다. 이때부터 갈레노스에게 환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는 당시 우울증을 앓고 있던 집정관 아내의 치료를 맡았을 뿐만 아니라 갈리아, 이집트, 시리아 등지에서 편지로 도움을 청한 환자들까지 돌봐야 했다. 그는 처방전과 직접 조제한 약을 환자들에게 주었다. 그러나 지나치게 약에만 의지하려는 의사들을 향해서는 ‘약장수’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갈레노스의 인체해부도. 고대 로마의 인체해부도이다. 중세 무렵에 쓰인 갈레노스의 친필 원고에 고대의4가지 체액설이 여전히 사용되고 있음을볼 수 있다.
갈레노스의 인체해부도. 고대 로마의 인체해부도이다. 중세 무렵에 쓰인 갈레노스의 친필 원고에 고대의4가지 체액설이 여전히 사용되고 있음을볼 수 있다.

그가 치료한 사례 중에 가장 흥미로운 경우는  페르시아 궤변가를 치료한 일이다. 그의 병력을 살펴보던 중 척추신경을 다친 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갈레노스는 그에게 침대에 누워 휴식을 취하도록 권했다. 푹신한 물건으로 등을 높게 바치자 환자는 바로 병이 낫게 되었다. 갈레노스는 환자의 완신경총(brachial plexus, 팔과 손으로 내려오는 신경)을 치료해 그의 고질병을 고쳐준 것이다. 이 일은 로마 전체가 들썩거릴 정도로 화제가 되었다. 갈레노스의 치밀한 진단과 박학다식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후에 그는 신경마다 지배하는 피부, 근육이 정해져 있는데 이 궤변가는 피부 신경을 다친 경우에 해당한다고 설명을 덧붙였다.

갈레노스는 히포크라테스의 의학 이론을 이끌었다. 그의 가장 주요한 저서로는 《인체 각 부위의 작용》 17권을 들 수 있다. 생명체는 ‘식물적 영혼’, ‘동물적 영혼’ 그리고 ‘이성적 영혼’으로 되어 있으며 결국은 ‘공기’를 호흡함으로써 유지된다는 내용이 저서의 주요 골자이다.

그는 동맥이 혈액을 운반하는 것이지 공기를 운반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또한 최초로 신경, 뇌, 심장의 작용을 연구했다. 그는 사고를 하는 기관은 뇌이지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심장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도 동맥과 정맥에 의해 혈액순환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깨닫지는 못했다. 혈액순환 원리를 발견한 영국의 생리학자 윌리엄 하비(William Harvey, 1578~1657)는 당시 갈레노스가 혈액순환 이론에 이처럼 근접하고도 그 사실을 발견하지 못한 데 대해 의아함을 표했다. 따라서 갈레노스는 출혈을 막는데 지혈 대신 사혈 요법을 견지했다.

갈레노스는 기독교 신자는 아니었지만 유일신을 믿었으며 육체는 영혼이 주재한다고 믿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을 신봉했기 때문에 자연계의 모든 사물은 존재 이유가 있다고 믿었다. 조물주가 세상을 창조한 데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인간도 조물주의 창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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