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고금 의술이야기] 살레르노 의학교의 성공 비화
[동서고금 의술이야기] 살레르노 의학교의 성공 비화
  • 강선주, 이문필 등 20인(빅북 제공)
  • 승인 2018.12.12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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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중세의 의학 — 암흑시대의 예고

살레르노 의학이 등장하면서 중세의 의학에도 서광이 비추기 시작했다.

나폴리에서 남동쪽으로 42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살레르노 의학교는 중세 최초의 의학교에 해당한다. 살레르노 지역은 초기에 그리스 식민지였다가 기원전 194년부터 로마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중세에 이르러 롬바르드족, 노르만족, 나폴리 로마족의 통치를 받았다. 이곳에서 언제부터 의학을 꽃피우기 시작했는지 알 길은 없지만 살레르노 의사들의 명망이 높아지면서 의학교를 건립하게 되었다. 이후 9세기 중엽에 이르러 살레르노 의학교는 이미 유럽의 유명한 의학교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유럽의 모든 의학이 집중된 살레르노 의학교는 기독교, 유대교, 그리고 아랍인들에게도 개방되어 있었다. 이에 살레르노는 ‘히포크라테스의 도시’라는 별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의학지식을 갈망하는 사람들은 모두 살레르노 의학교로 몰려들었다.

11세기에 이르러 살레르노 지역의 일부 의학자들이 그리스어로 된 의서를 라틴어로 번역하면서 종교의 그늘에 가려져 있던 의학이 서서히 생기를 띠기 시작했다.

외과학 실습 장면. 로저(Roger)가 쓴 《외과학 실습》에 있는 그림으로써 이탈리아 도시 살레르노에는 12세기까지 유럽 제일의 의학교가 있었다.
외과학 실습 장면. 로저(Roger)가 쓴 《외과학 실습》에 있는 그림으로써 이탈리아 도시 살레르노에는 12세기까지 유럽 제일의 의학교가 있었다.

 

살레리노 의학교는 열 명의 의사 교수진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최고령자가 총장을 맡았다. 이들은 고대 그리스로마시대의 의학을 비롯해 아랍 의학까지 가르쳤다. 성직자들의 감시에서 벗어나 낙후된 교과서를 버리고 젊은 의사들에게 배움의 장을 마련해 주고자 했던 그들의 노력으로 이곳은 유럽 의학의 중심지로 급속하게 발전했다. 쾌적한 자연환경과 살레르노 의학교의 명성에 힘입어 수많은 환자들이 살레르노로 몰려들었다. 이곳에는 내과, 외과 진료소와 고아들을 보살피는 병원, 자선단체, 약국 등이 두루 갖추어져 있었으며 여성 교수들이 있었다는 점에 주목할 만하다. 이는 의학사상 매우 고무적인 선례를 남겼다. 현존하는 문헌자료에도 이들의 존재가 기록되어 있으며 실명을 거론한 자료도 있다. 일례로 “아기네스(Agyness)라는 여교수는 마치 자석이 쇠를 끌어당기듯 젊은 청년들을 매료시켰다.”라는 내용이 있다. 또한 트로툴라(Trotula)라는 여의사가 지은 부인과 질병 관련 논문은 16세기까지 완벽한 교과서로서 그 역할을 했다.

살레르노 의학교의 교재는 주로 정제된 운율을 담은 시로 쓰였다. ‘시’로 된 교재는 중국에서는 극히 보편적이나 유럽 사람들 눈에는 매우 참신한 시도였다. 살레르노 의학교의 교수들은 간단하고 쉽게 읽을 수 있는 위생학 교재를 저술했는데 이는 역사적으로 가장 많이 팔린 의학 서적이 되었다. 1480년에 초판에 들어간 《살레르노 양생학》은 362수의 시로 시작해 3,520수까지 늘어났다. 이 의학교의 교수들이 운율시를 이용해 의학서적을 저술한 데는 잉글랜드 국왕에게 건강지식을 알려주려는 목적이 있었다. 즉 뇌를 과도하게 사용하지 말고 격분하여 심장에 부담을 주지 말며 술과 고기를 줄이는 한편, 조용한 환경에서 웃음을 잃지 말고 소식(小食)을 하도록 당부했던 것이다.

최초의 살레르노 의학교. 중세는 기독교의 영향으로 상대적으로 의학의 침체기였지만 살레르노 의학교는 중세 대학교의 모태가 되었으며, 여성도 강의를 수강할 수 있도록 하였다. 특히 살레르노는 양생학을 중시하였다.
최초의 살레르노 의학교. 중세는 기독교의 영향으로 상대적으로 의학의 침체기였지만 살레르노 의학교는 중세 대학교의 모태가 되었으며, 여성도 강의를 수강할 수 있도록 하였다. 특히 살레르노는 양생학을 중시하였다.

‘시’를 이용한 《살레르노 양생학》 교재는 두말할 나위 없이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 교재들은 여러 차례에 걸쳐 프랑스어, 독일어, 영어, 이탈리어로 번역되었으며 1852년에는 300번째 판본 인쇄에 들어갔다. 민간에서도 시의 운율 때문인지 《살레르노 양생학》이 크게 유행했으며 이로써 전 유럽 가정마다 보건위생 의식이 높아지게 되었다. 살레르노 의학은 단순하면서도 일상생활과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었기 때문에 파급효과가 매우 컸다. 18세기에 이르러서는 모든 의학 문헌의 지침이 되었으며 오늘날에도 민간 의학을 중심으로 살레르노 의학은 여전히 그 명맥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당시 프로이센의 유명한 국왕 프리드리히 2세(Friedrich II)는 다음과 같은 규정을 법제화했다. 즉 살레르노 의학교의 학생은 반드시 3년간 고전문학을 배우고 5년간 전문지식을 익힌 후 교수진과 왕실 일가로 구성된 위원회의 엄격한 시험을 통과해야 했다. 시험에 합격한 사람은 반지와 월계관, 증서 그리고 평화를 상징하는 입맞춤을 받았다. 의학교의 교재는 히포크라테스와 갈레노스의 저술을 모범으로 삼았다. 이 밖에도 액체병리학과 진단학도 중요한 과목으로 선정되었다. 살레르노 의학교의 액체병리학 교재는 1858년 위고(Wigo)가 저술한 《세포병리학》이 출판되기까지 최고의 권위를 누렸다.

소변검사는 의사들이 인체의 이상을 알아보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었다. 소변은 청진기 못지않게 중요한 진단 도구였다. 그러나 의사들이 자신의 능력을 돋보이게 하려고 과시용으로 소변검사를 실시한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스페인의 점술가이자 의사였던 아날드(Arnald of Villanova, 1235~1311)는 “소변에서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는데 환자가 계속 두통을 호소한다면 간이 막혔다고 알려주어라. 환자는 비록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해도 여러 번 들으면 왠지 무척 중요한 얘기일 거라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이에 비해 살레르노 의사들은 소변을 통해 질병과 건강 상태를 분별해내는 예리한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소변을 열여덟 가지 색깔로 구분했다. 살레르노의 의학고서 필사본에는 40페이지에 걸쳐 소변의 침전, 냄새, 용량, 그리고 치료 관련 비법 등이 적혀 있다.

12세기에 살레르노 의학교는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이 시기의 주요 활동은 모두 의학교의 가장 중요한 저술인 《보건의학 Regimen sanitatisSalernitanum》에 기록되어 있다. 이 책에는 식사를 통한 영양섭취, 위생안전, 관장을 통한 배설, 사혈요법, 부항, 합리적인 약 복용 등 각 분야의 의학지식과 기술이 총망라되었다. 이 밖에도 1050년에 편찬되어 의학용어의 기초를 확립한 《질병》을 비롯해 《실천》 등의 책이 있다.

살레르노의 의사들은 점차 중세의 미신을 버리고 히포크라테스 정신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환자의 음식, 생활습관 등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관찰력과 지식을 바탕으로 한 이론을 형성해나갔다. 또한 그리스 의사들처럼 환자를 인간으로, 질병을 자연현상의 하나로 여겼으므로 일반적인 치료방법을 통해 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때 이미 의사에 대한 호칭이 ‘메디커스(medicus, 치료)’에서 ‘피지커스(physicus, 물리)’로 바뀌어 있었다. 이는 의학이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자연과학 영역 속에 포함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살레르노 의학교의 지침서 가운데는 의사가 환자의 신뢰를 얻는 방법을 다룬 책도 있다. 이 지침서에는 “의사가 환자의 집을 방문할 때 먼저 환자의 가족들에게 인사를 드리고 예의 바르게 행동해야 한다. 후에 환자에게 다가가 앉으며 가족들이 주는 음료를 받아든다. 이때 환자의 가정환경과 이웃들을 칭찬하도록 하고 환자와 가족의 건강을 축복해야 한다.”는 등의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

살레르노 의학교가 배출한 의사들은 외상을 대담하게 치료하는 공통점이 있었는데, 이런 이유로 스스로 ‘내·외과에 모든 능한 의사’라고 칭했다. 이러한 개념은 그리스어의 ‘외과학(Chirurgie, ‘손’을 의미하는 ‘cheir’와 ‘작업’을 의미하는 ‘ergon’이 합쳐진 말로 손을 써서 하는 작업이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다. 독일어로는 ‘수공’을 뜻한다. 그런데 당시 수공업은 매우 천시를 받고 있었으며 그 때문인지 외과의사의 지위도 상당히 낮았다. 그러나 ‘내·외과에 모두 능한 의사’는 명망이 굉장히 높았다.

당시 스콜라학파의 의사들은 ‘외과’를 의학의 범주에 포함시키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1425년에 외과의사 한 명이 정식으로 비엔나 의대에서 ‘외과’를 전공하고자 했다. 그러나 외과를 경시하던 담임교수로부터 무려 세 차례나 거절을 당하고 말았다. 그로부터 40년이 흐른 후, 비엔나 대학에서는 처음으로 ‘외과’를 전공한 의사에게 학위를 수여했다.

백내장 외과수술 장면. 11세기 이탈리아 살레르노 의학파가 필사한 도안한 백내장을 치료하는 외과수술 장면이다. 수도사에 의해 설립된 살레르노 의학교는 기초 철학을 비롯해 의학전문 지식을 가르쳤으며 1년 동안 사제 간에 실습을 시행토록 했다.
백내장 외과수술 장면. 11세기 이탈리아 살레르노 의학파가 필사한 도안한 백내장을 치료하는 외과수술 장면이다. 수도사에 의해 설립된 살레르노 의학교는 기초 철학을 비롯해 의학전문 지식을 가르쳤으며 1년 동안 사제 간에 실습을 시행토록 했다.

살레르노 의학교가 의학 발전에 직접적인 공헌을 했다고는 볼 수 없다. 그러나 의학이 종교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연구를 추진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줌으로써 향후 의과대학이 발전하는 데 기여하였다. 여러 지방에서 속속 대학들이 설립되면서 살레르노 의학교도 이들과 경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이 과정에서 점점 쇠퇴일로를 걷게 되었다.

중세 의학의 또 하나의 특징은 약국이 성행했다는 점이다. 고대 그리스시대에는 의사들이 직접 약용식물을 이용해 약을 조제했으며 따로 약국이 없었다. 약국은 수도원의 수도사들이 약용식물을 재배하면서 약을 만들기 시작했던 데서 기원한다. 당시의 약국관리 조례에는 조제약의 성분을 두 종류로 규정하고 있었다. 첨가제라고 불렸던 간단한 약물과 가공과일이라고 불렸던 조제약이었다. 독립적인 형태의 약국은 1240년 프리드리히 2세가 ‘살레르노 칙령’을 반포한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칙령에는 의사가 약 처방을 할 수 없으며 약국의 경영에 참여해서도 안 된다고 규정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약국을 설립하고 경영하는 데 의사가 개입하지 않는 대신 약제사의 수준을 올릴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그들은 약국을 개업하기 전에 반드시 환자의 이익과 행복을 보장하겠다는 맹세를 해야 했다. 약품의 재료는 시간에 따라 변화하기 마련하지만 약국에 들어섰을 때 나는 익숙한 냄새는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러도 여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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