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중세의 의학 — 암흑시대의 예고

사혈요법은 ‘4가지 체액설’에 근거를 두고 있다. 사혈을 통해 질병의 원인 물질을 본래 기생하던 장기에서 다른 부위의 장기로 옮기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병이 생긴 부위의 반대 방향으로 사혈하는 것을 ‘유도(誘導)’, 병이 생긴 부위와 동일방향으로 사혈하는 것을 ‘기폭(起爆)’이라고 칭했다. 사혈요법은 안면홍조증과 통증 제거에 효과가 있었다.

살레르노 의학교의 《양생학》에는 “사혈요법은 분노를 진정시키고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고 상사병에 걸린 남녀가 정신분열을 일으키지 않도록 도와준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루이 14세(Louis XIV)의 왕비 마리아 테레사는 왕궁에서 음란한 얘기를 들을 때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일주일에 두 번씩 팔뚝에 피를 냈다고 한다. 당시 ‘사혈요법’은 병적일 만큼 일상적으로 행해졌다. 상사병, 우울증 등에도 효과가 있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사혈요법이 건강의 첫걸음이라고 생각했다. 팔뚝을 찔러 피를 내는 방법은 질병을 일으키는 요소를 배출하는 가장 간편한 방법이었던 것이다. 보통은 작은 수술용 칼로 정맥을 절단해 피를 냈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거머리를 이용하거나 부항을 뜨기도 했다.

사혈요법은 봄, 가을에 특히 성행했다. 의사들은 환자에게 사혈요법으로 체내의 원소들이 새로운 계절에 적응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다. 그러나 의사들은 사혈요법의 이론만 다루었을 뿐, 실제 수술은 이발사들에 의해 행해졌다. 이발사들이 이미 외과의사의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의사들은 수술 행위를 매우 천시했으므로 절대 직접 수술을 하지 않았다.

사혈요법에 있어서는 시간이 매우 중요했다. 점성학의 원리에 따라 일자, 계절, 그리고 달의 위치 등을 모두 고려했다. 일례로 유방 부위는 반드시 게자리 별자리에 정확하게 진입했을 때 사혈을 시도하도록 했다. 환자의 체질에 따라 사혈 시간이 바뀌기도 했다. 그러나 직접 사혈 수술을 행한 이발사들은 점성학을 알지 못했으므로 당시 유행했던 ‘별자리에 따라 사혈 부위가 표시된 인체도’를 보면서 사혈을 시도했다.

또한 이 도안이 그려진 소책자에는 환자에게서 채취한 혈액의 색깔, 밀도, 거품여부 등을 어떻게 분석하는지에 대해서도 상세한 설명이 첨부되어 있었다. 물론 염증 여부도 관찰해야 했다. 사혈요법은 대개 공중목욕탕에서 행해졌다. 16세기에 이르러 접촉성 전염병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면서 공중목욕을 금지하는 규정들이 반포되자 목욕탕은 점점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그렇다면 수술을 이발사들에게 시킨 후 의사들은 무엇을 했을까? 1255년 전까지 교회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 연구를 반대했다. 그러나 아랍에서 그의 작품들이 먼저 번역되어 큰 명성을 얻으면서 다시 유럽학술계에도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당시 유행한 스콜라철학도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전성기를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일부 학자들은 “말의 이빨이 몇 개 났을 때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리니우스 등 고대 철학자들의 작품을 열람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놓고 열띤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토론이 격화되면서 두 파로 나뉘기 십상이었는데 누가 더 논리적으로 대중을 설득할 수 있느냐에 따라 승패가 갈렸다.

그러나 논쟁에만 너무 몰두한 나머지 정작 가장 중요한 일, 즉 말의 이빨을 확인하는 과정을 빠뜨리기 일쑤였다. 중세 사람들은 고대 철학의 권위, 교회의 예언 등에 대해서는 절대적인 지위를 부여했다. 과학은 그들의 저서를 연구하고 고증해 모든 문제의 답변을 찾는 수단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들이 고증하려는 문제들은 모두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예를 들면 ‘바늘 위에 몇 명의 천사가 앉을 수 있는가?’라는 식이다.

학술계의 논쟁이 갈수록 격화되면서 스콜라철학의 영향은 의사들에게까지 미치게 되었다. 히포크라테스를 계승하고 환자에 대한 세심한 관찰을 위주로 했던 살레르노 의학교 의사들조차 의학은 ‘고대 저술을 연구하는 일종의 추론 기술’에 불과하다고 여겼을 정도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 외에 다른 것은 토론할 가치조차 없었던 것이다.

14세기에는 장원(莊園)과 수도원이 쇠퇴하고 상업과 도시가 크게 발달했다. 상인들은 큰 부를 축적했으며 공업기술자들은 봉건시대의 과중한 세금과 교회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농노들은 여전히 생계가 막막했다. 가난과 오염이 새로운 공포로 다가올 무렵, 빈곤층으로 전락한 이들은 각 지역의 길드 조직에 가입하기 시작했다. 중세 말엽, 길드 조직은 사회 각 분야로 파고들어 업종별로 회원들의 관리에 나섰다. 또한 길드 조직은 도시행정과 연합한 형태로 발전했다. 걸인들도 자신들의 연맹을 맺을 정도였으므로 의사들이 예외일 수 없었다. 14세기 초 공업기술 분야 6위에 올랐던 플로렌스의 의사 길드는 다음과 같이 새로운 규정을 마련했다. 플로렌스 의사 길드의 고문위원이 실시하는 공개시험을 거치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플로렌스에서 의료행위를 할 수 없도록 한 것이다.

1348년 흑사병이 유행하면서 플로렌스에도 의사 부족 현상이 생겼다. 이처럼 사망률이 높은 전염병 앞에서는 의사라고해서 안전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의사 길드의 순위는 2위까지 치솟았다. 의사의 지위가 격상되는 분위기 속에서 정부 당국도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의학을 공부하기 바랐다. 이듬해에 모든 의사들은 의학교에 등록하여 재교육과 정기적인 해부실험에 참여하도록 하는 법률이 통과되었다. 의사들의 수준을 높이기 위한 조치였다고 볼 수 있다.

1377년 뉘른베르크는 정부가 의사를 고용해 빈곤층을 치료하도록 하는 법적 발판을 마련했다. 정부의 의사로 고용되면 관련 법률에 따라 보수를 받을 수 있었으며 말 한 필과 장원에서 생산되는 상품까지 지급되었다. 이처럼 높고 안정적인 보수로 인해 의사들은 흑사병이 만연하던 시기에도 자신들의 자리를 굳건히 지켰다. 1426년 헝가리의 지기스문트(Sigismund) 황제는 도시마다 의사를 고용하도록 하는 칙령을 반포했다. 칙령에는 의사들이 가난한 사람을 치료하는 대가로 정부가 1년에 은화 백 냥을 지급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규정은 의사들이 절대로 무료로 의료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꼬집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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