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중세의 의학 — 암흑시대의 예고

스승과 제자들로 구성된 하나의 집단이 형성되면서 ‘대학’의 기원이 싹텄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이탈리아 최고의 번화한 도시 가운데 하나였던 볼로냐에서는 의학을 스콜라철학의 속박에서 해방시키는 역사적인 사조가 형성되고 있었다. 11세기부터 줄곧 법률학교로서의 명맥을 유지해온 볼로냐 대학은 민주적 방식으로 학교를 운영했으며 대학에 자치권이 있다고 과감하게 선포했다. 학생들은 스스로 교수를 선택할 수 있었으며 총장을 추천할 수도 있었다. 또한 강의 내용을 스스로 취사선택하고 교수의 임면에 참여할 권리를 가졌다. 총장은 추기경을 비롯해 모든 직위의 사람들을 관할했으며 그의 직위는 정부 관료의 성격을 띠었다. 대학도 ‘길드’의 원칙에 따랐으므로 학생들이 학비를 납부한 후 최대한의 이익을 얻을 수 있도록 교수들은 하루도 결강할 수 없었다. 만약 긴급한 일로 해당 도시를 떠나야 할 일이 발생하면 반드시 돌아오겠다는 약속으로 거액의 보증금을 내야만 했다.

당시 볼로냐 대학은 인재의 산실이었다. 이 가운데 플로렌스의 타데우스(Tadeus, 1223~1303)는 단테도 언급한 적이 있는 인물로 그에게 치료를 받으려면 고가의 비용을 지불해야 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을 번역해 《어떻게 건강을 유지할 것인가》라는 책을 편찬했는데 이 책에서 그는 매일매일 운동할 것을 강조했다.

볼로냐 대학은 남학생과 더불어 여학생도 모집했다. 여성을 의학도로 받아들인 최초의 대학인 셈이다. 중세 유럽문화의 중심으로 거듭나게 된 볼로냐 대학은 1156년 의과를 개설했으며 아랍어로 된 의학서를 교재로 삼았다. 볼로냐 대학에서는 13세기부터 본격적인 의학교육이 실시되었다. 물론 현대 의학에 비하면 허술하기 짝이 없었지만 법학 대학의 강력한 보호 속에 있었기 때문에 종교적인 색채를 배제할 수 있었다.

살인사건이 발생하면 지방정부는 의사에게 검시를 의뢰해 단서를 찾고자 했다. 1302년 아졸리니라는 귀족이 의문의 죽음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바르톨로메오라는 의사를 불러 혹시 독살당한 것은 아닌지 검시토록 했다. 중세 외과의사는 도살자나 사형 집행자와 다를 바가 없는 대우를 받았다. 따라서 파리의 교수단체는 1350년 의대 졸업생들이 외과에 종사하지 못하도록 금하기도 했다. 그러나 볼로냐 의대는 외과를 매우 중시했으며 해부학 연구를 다시 실시하기도 했다. 물론 인체 구조 이론은 여전히 갈레노스의 학설을 근본으로 삼았다. 볼로냐 대학에서 새로운 외과기술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처럼 자유로운 학습 환경이 조성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볼로냐 대학에는 따로 점성학을 가르치는 교수도 있었다.

16세기까지 볼로냐 대학의 해부학은 유럽에서 최고의 권위를 누렸으며 후에 독립된 학과로 발전했다. 특히 이 대학 몬디노(Mondino) 교수는 당시 유행하던 해부학 지식을 종합해 책으로 냈는데 묘사가 매우 애매모호한 단점이 있었다. 일례로 인체의 심장 크기를 묘사하면서 “작지도 크지도 않다.”라고 했을 정도였다.

볼로냐 대학이 학생들의 학사행정 참여를 허가한 데 반해 프랑스 파리 대학은 학사 관련 업무를 모두 교수들이 맡았다. 중세의 각 대학은 나름대로의 학칙을 정해 놓았으며 이 가운데 일부는 지금까지도 그대로 시행되고 있다. 당시에도 시험, 학위, 교과 등의 규정이 있었으며 의대 졸업생들의 대부분은 교수를 직업으로 택했다. 중세의 대학들은 학교별로 학생 수가 천차만별이었다. 볼로냐 대학, 파리 대학은 각각 5천 명에 달했으며 옥스퍼드, 캠브리지 등은 3천 명 정도였다. 캠브리지를 비롯한 일부 대학은 그때부터도 학사, 석사, 박사 등의 학위를 수여했으며 대학의 교육기간은 대개 4년에서 8년 정도였다.

유럽에 대학이 발전하면서 의학에 영향을 끼친 교수들이 대거 등장했다. 이때 아랍 의학도 큰 영향을 끼쳤다. 당시의 유명한 외과의사 숄리아크(Guy de Chauliac, 카울리아코, 1300~1368)가 저술한 《외과학총론 Chirurgiamagna》에서는 아비센나(Avicenna), 라제스(Rhazes) 등의 학설을 거의 모든 페이지마다 인용하고 있다. 중세 후기에 이 책은 매우 인기를 얻어 15세기에 벌써 재판 14쇄에 들어갔다. 16세기에 이르러서도 계속 판본을 바꾸어 출판되었다. 또한 당시의 유명한 의사 페라리(Ferrari de Grado)가 저술한 책에는 아비센나의 학설이 3천 회 이상, 라제스와 갈레노스의 학설이 1천 회 이상, 그리고 히포크라테스의 학설이 140회 인용되었다. 일부 의사들은 점성학 교수를 겸하고 있었다. 17세기 말 파리 대학의 교수들은 혜성의 움직임이 전염병 유행의 징조인지, 달이 인체에 영향을 끼치는지에 대한 문제를 두고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18, 19세기에 이르러 점성학은 점차 쇠퇴했다.

인쇄술이 발명되기 전이었으므로 중세 유럽의 서적은 매우 진귀한 물품에 속했다. 당시 대학에서도 서적을 구하기가 매우 어려울 정도였다.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가 국가도서관에서 라제스의 저술을 찾아보려 했지만 그의 저술을 소장하고 있는 대학은 파리 대학뿐이었다. 그는 결국 파리 대학으로 사람을 보내 그의 저술을 빌려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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