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르네상스시대의 의학 — 휴머니즘 의학

르네상스시대에는 미켈란젤로(Michelangelo), 라파엘로(Raffaello), 뒤러 등 위대한 화가들이 탄생했다. 그들은 인체의 외형을 정밀하게 연구해 체형을 과학적으로 묘사해냈으며 특히 근육과 골격 구조를 파악하기 위해 직접 해부까지 실시했다. 이들은 인체가 느끼는 고통과 분노의 감정을 면밀히 관찰하며 환자와 노인의 모습을 매우 상세하게 그리기도 했다. 뒤러는 자신의 초상화를 그려 주치의에게 보낸 적이 있는데 그 그림에는 “내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황색 원으로 표시된 부분에 통증이 있소.”라고 적혀 있었다.

이들 예술가 중에는 인체구조와 그 기능에 대한 관심이 ‘예술’의 영역을 벗어날 정도로 열광적인 경우도 있었다. 특히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Vinci, 1452~1519)는 의학과 과학 두 분야에 모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인간이 공포, 고통을 느낄 때의 표정을 묘사하기 위해 교수대까지 가서 사형수를 관찰할 정도였다. 그는 섬세한 관찰력과 뛰어난 회화 실력을 동원해 인간의 감정, 인체가 지닌 비밀을 밝히려 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초상화. 다빈치는 천재적인 예술가이자 시인이었으며, 또한 엔지니어, 건축가, 물리학자, 생물학자, 지질학자, 해부학자였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초상화. 다빈치는 천재적인 예술가이자 시인이었으며, 또한 엔지니어, 건축가, 물리학자, 생물학자, 지질학자, 해부학자였다.

다빈치는 천재적인 예술가이자 시인이었다. 또한 뛰어난 엔지니어, 건축가, 물리학자, 생물학자, 지질학자, 해부학자였다. 초기에는 이탈리아의 화가이자 조각가였던 베로키오(Andreadel Verrocchio, 1435~1488)의 수하에서 그림을 배웠으며 플로렌스의 ‘산타 마리아 노바 병원’에서 해부학을 공부했다. 후에 밀라노에서 당시 유명한 해부학 교수였던 마르칸토니오 델라 토레(Torre, M. A. D)와 함께 인체해부학 백과전서 제작에 착수했다. 그들은 인간이 출생에서 사망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물론, 머리부터 발끝까지 인체의 구조를 상세하게 묘사했다. 물론 생리적 기능과 비교해부학적 지식도 함께 기록했다. 그는 자신의 노트에 다음과 같은 내용을 기록해 놓았다.

“이러한 도안을 보는 것보다 해부 실험을 직접 보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 말이 맞다. 아무리 똑똑한 사람이라 해도 단순한 그림 한 장으로 인체의 모든 부위를 이해하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나는 열 구의 시체를 해부해 장기와 조직의 분류 작업을 했다. 혈관 주변의 매우 작은 근육을 떼어낼 때 모세혈관에 아주 미미하게 피가 스며든 것을 제외하고는 전혀 출혈이 없었다. 시체는 오랜 시간 보관할 수 없으므로 여러 구의 시체를 동시에 해부해 인체의 각 부위별 지식을 얻었다. 또한 서로 다른 차이점을 발견할 수도 있다. 나는 이 일을 매우 사랑한다. 그러나 그 앞에 수많은 장애가 버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러한 장애를 이겨낸다 해도 깊은 밤 어둠 속에서 이 많은 시체를 분리하고 가죽을 벗기는 작업은 무섭고 두려운 작업임에 분명하다. 비록 내가 두려움을 극복했더라도 회화 실력이 없으면 눈에 보이는 이 상황을 그대로 옮겨 놓을 수 없다. 또한 그림에 재주가 있다고 해도 인체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없으면 모두 허사이다. 인체에 대한 지식과 그림 그리는 재주를 모두 가지고 있는가? 그렇다면 기하 도형에 대한 지식과 근육의 역량, 강도를 산출해낼 줄 몰라도 된다. 이보다 더 필요한 건 인내심과 근면함이기 때문이다.”

다빈치의 인체비례도. 비트루비우스(Vitruvius)는 비례, 대칭, 형식미를 강조했던 로마의 유명한 건축가였다. 그는 다빈치의 요청에 의해 인체해부도를 그렸다고 한다.
다빈치의 인체비례도. 비트루비우스(Vitruvius)는 비례, 대칭, 형식미를 강조했던 로마의 유명한 건축가였다. 그는 다빈치의 요청에 의해 인체해부도를 그렸다고 한다.

다빈치와 토레는 산토 스피리토 시체안치소에서 무려 30구가 넘는 시체를 해부하며 1000여 장의 해부도를 그렸다. 이는 인체구조와 기능을 묘사한 매우 뛰어난 소묘로 예술과 해부학을 완벽하게 융화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5세기까지 해부학은 외과학과 함께 강의를 받아야 했다. 1570년이 되어서야 이 두 분야가 완전히 독립하게 되었다. 중세에 해부학은 골격, 신경, 근육, 동맥, 정맥 등 5종의 해부 도안을 사용했다. 질병과 상처가 났을 때의 인체의 상황을 묘사한 이 도안은 수백 년 동안 전혀 수정되지 않았다. 그 후 몬디노시대부터 1539년을 전후해 인쇄술이 발달하자 조잡하기 짝이 없는 인체 기관 도안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러한 조잡한 그림에 비해 다빈치가 그린 인체해부도는 투시화법, 기하학, 인체 비례 등의 연구 결과로 탄생한 완벽한 도안이었다. 해부학은 다빈치의 손에서 새로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토레가 페스트로 세상을 떠나면서 다빈치도 해부학 백과전서 작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이 백과전서가 출판되었다면 의학은 훨씬 빠른 속도로 발전했을지도 모른다. 그들의 작품은 해부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베살리우스보다 40년이나 앞선 것이다.

다빈치는 말년에 로마로 이주했다. 그러나 로마교황은 성경 모독을 이유로 다빈치의 인체해부를 금지했다. 그가 해부학에서 거둔 성과는 그의 예술작품의 가치와 맞먹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출판되지 못했으므로 그 파급효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이 위대한 작업은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겨우 네 살에 불과했던 베살리우스에 의해 완성되었다.

다빈치가 세상을 떠난 후 120여 권이나 되는 그의 자필 원고는 여러 제자들의 손에서 유럽 각지로 흩어져 버리고 말았다. 후에 영국의 왕실 윈저 가문의 도서관에서 대부분의 원고가 발견되었고 1784년 윌리엄 홀만 헌트(William Holman Hunt)에 의해 출판되었으며 1898년에서 1901년까지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로 번역되어 파리, 토리노에서도 출판되었다.

다빈치는 ‘파우스트 박사(모든 것을 알고 체험하여 자아를 무한으로 확대하려는 성향을 지닌 사람)’이다. 동성애 성향을 가졌던 그는 사생아였다고 한다. 스물세 살이 되던 해에 ‘동성애’를 했다는 죄명으로 재판에 회부된 적이 있었다. 비록 무죄로 석방되었지만 이 일은 그에게 심리적으로 큰 상처를 남겼다. 이때부터 다빈치는 아무도 신뢰하지 않았으며 원망과 적대심에 가득 찬 태도를 보이곤 했다. 그러나 인간관계는 매우 원만했다. 르네상스시대에는 왕실 왕자들의 지원을 받았으며 꽤 오랫동안 아름다운 미소년이 그의 옆을 지키기도 했다. 물론 그는 자신의 가장 측근에게도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다빈치는 자신의 발명품과 새로 발견한 사실들을 다른 사람들이 알게 될까봐 전전긍긍했다. 또한 늘 공포심과 지적 갈망 두 가지 상반된 감정에 시달리고 있다고 토로했었다. 어두컴컴한 동굴 너머에 과연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공포 속에서도 한 걸음씩 다가서는 습성이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일상은 물론 자연에도 신비와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으나 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 비밀을 파헤치려 했다. 시대에 영합하지 않는 주관이 있었기 때문에 예술가로서 뿐만 아니라 과학자로서도 뛰어난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해부학을 연구하면서 다빈치는 한 번도 억측을 하는 법이 없었다. 갈레노스의 저술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으며 인체 해부를 통해 직접 눈으로 보는 것만 믿었다. 즉 실험과 관찰을 통해 결론을 도출하고자 했다. 그는 과학과 예술은 자연을 대상으로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과학은 경험에서 시작된다고 여겼다. “외부에 대한 인식은 우리가 느끼는 감각에서 출발한다. 감각을 거치지 않은 사상은 허상에 불과하므로 진리를 기대할 수 없다.” 다빈치의 관점을 잘 말해주는 대목이다.

그는 해부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흐르는 물과 석회수로 장기를 깨끗이 씻었다. 그리고 장기 안에 파라핀을 넣었다. 그가 발명한 이 방법은 지금까지도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그는 근육운동을 관찰하기 위해 철사로 다리 모형을 만들기도 했으며 안구 구조를 파악하려고 눈알을 삶아 그 응고된 부분을 관찰하기도 했다. 또한 최초로 태반과 뇌신경에 대해서도 연구했다. 대뇌 해부를 처음 시도한 인물도 바로 다빈치였다. 그는 장기를 서로 다른 방향의 횡단면으로 나누어 세밀하게 관찰해 그 구조와 상호관계를 묘사했다. 이는 현대 해부학에서도 사용하는 방법으로 장기를 정면, 측면, 후면에서 관찰한 후 인체의 구조, 형태를 밝히는 과정을 말한다. 다빈치는 자궁의 형태, 태아가 모체 자궁 안에 있는 위치 등도 정확하게 묘사했다. 또한 안구의 시각 부위를 모형으로 만들어 물체가 망막에 잡히는 원리를 설명했다.

근육을 해부하는 과정에서 다빈치는 근육마다 특수한 기능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관상동맥과 그 혈류를 도식화하고 정맥판막에 대해서도 연구했지만 심장이 좌, 우에 각각 심방, 심실로 되어 있다는 사실까지는 인식하지 못했다. 다만 심장이 인체의 모든 혈관이 시작되는 근육기관이며 심장 판막이 있어 혈액을 한 방향으로만 흐르게 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공기는 바로 심장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호흡을 통해 허파로 먼저 들어가는 것을 발견한 후, 허파의 기관지가 바로 심장과 연결되어 있다는 갈레노스의 견해를 부정했다. 그는 또한 동력학의 관점으로 혈액순환의 관계를 설명하려고 시도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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