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르네상스시대의 의학 — 휴머니즘 의학

‘매독’이란 명칭이 처음 유럽에 등장한 해는 1503년이다. 그전에는 300여 종의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세계 최초의 유행병 전문가 프라카스토로(Hieronymus Fracastorius, 1483~1553)가 《매독 Syphilis sive Morbus Gallicus》이란 제목의 의학시를 발표한 것을 계기로 이 명칭은 지금까지 계속 사용되고 있다. 프라카스토로는 의사이자 시인이었으며 물리학, 지질학, 점성학, 병리학을 연구하던 학자였다.

그는 고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양치기의 이름 가운데 ‘시필리우스(Syphilus)’란 부분을 취해 매독의 명칭으로 사용했다. 시필리우스는 태양의 신 아폴로에게 죄를 지어 사지가 부러지고 뼈, 치아가 드러나 썩는 형벌을 받았다. 또한 숨을 쉴 때마다 악취가 뿜어 나오고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고 한다.

‘매독’이란 새 명칭이 사용되고부터 이 질병에 대처하려는 움직임도 빠르게 확산되었다. 프라카스토로는 《매독》에서 질병의 증상과 수은, 유창목 등을 이용한 치료방법을 서술해 놓았다. 특히 임상 경험을 사실적으로 생동감 넘치게 묘사했다.

매독을 ‘유행병’에 포함시킨 그는 ‘발진티푸스’를 최초로 발견하기도 했다. 1546년 출판된 《전염병학 De Contagione》에는 “직접 느낄 수 없는 수많은 ‘질병의 종자’들이 빠르게 번식한다.”고 언급하는 등 ‘세균’의 개념이 최초로 언급되어 있다. 그는 전염병의 경로를 세 가지로 설명했다. 첫째는 접촉을 통한 감염이며 둘째는 옷, 침대시트, 개인물품 등 매개체를 통한 감염, 셋째는 공기 속에 있는 세균을 통한 감염이다. 또한 뱀에 물린 것과 같은 중독 증상과 전염병을 구별하기도 했다. 전염병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세균 박멸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폐결핵이 세균감염에 의한 질병이라고 정의했다. 따라서 가장 이상적인 치료방법은 부식제(腐蝕劑: 피부나 점막의 불필요한 조직을 썩게 하거나 파괴하여 제거하는 약)로 세균을 박멸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현미경을 이용해 세균의 존재를 직접 확인하기까지 이는 매우 획기적인 논리였다. 그러나 프라카스토로의 시대를 앞선 의식은 실험이나 관찰로 증명되지 않았기 때문에 폭넓은 지지를 얻지는 못했다.

또한 그가 비록 매독을 세밀하게 연구하기는 했지만 매독의 원인은 여전히 별자리의 혼란에서 찾고 있었다. 그는 점성학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로 사람들은 그를 독일 세균학의 창시자로 불리는 바서만(August von Wassermann, 1866~1925)과 비교하기도 한다.

당시 외과의사들에게 매독은 ‘불치의 병’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이 때문에 매독에 걸린 환자들은 금품을 노린 돌팔이 의사들에게 속는 경우가 허다했다. 돌팔이 의사들은 갈레노스의 약초 치료법 대신 금속 치료법을 택했다. 그들이 주로 사용했던 수은은 독성이 강해 피부와 장기에 심각한 손상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만성 수은중독까지 유발했다. 따라서 양심의 가책을 느낀 일부 의사들은 점차 수은을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1세기 무렵, 고대 그리스의 의사 디오스쿠리데스(Dioskurides)는 일찍이 수은을 과다하게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 바 있다. 네덜란드어 가운데 ‘돌팔이 의사’를 지칭하는 ‘Qacksalber’는 당시 의사들이 남용했던 ‘수은(Quecksiber)’에서 유래한 것이다.

수은 치료가 백해무익했던 것은 아니었다. 1497년부터 1907년까지 의사들은 임상 실험을 통해 수은의 양과 용법을 끊임없이 개선했다. 매독에 사용하는 근육주사에 적당량의 수은을 가하면 매독의 나선균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독성이 매우 강했다. 매독 치료에 ‘요드’를 사용하는 의사들도 있었다. 그러나 요드제는 나선균을 죽이지 못하고 대신 육아종(肉芽腫: 육아 조직을 형성하는 염증성 종양)을 제거하는 작용만 했다.

인문주의자이자 비평가였던 후텐(Ulrich von Hutten, 1488~1523)은 매독에 걸린 후 열한 차례나 수은 치료를 받았기 때문에 그 고통과 후유증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침이 끊임없이 흐르고 언어장애를 유발하며 구강염증도 생겼다. 또한 손, 안면근육, 혓바닥이 떨리고 심각한 두통이 수반되었다. 요도가 막히는 요폐 증상이 나타나고 쉽게 흥분하는 등 성격에도 영향을 미쳤다. “고름이 맺힌 종기가 밤처럼 딱딱해지고 심한 악취를 풍기며 진물이 흘렀다. 이 냄새를 맡은 사람들은 누구나 그가 병에 걸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후텐이 참담한 마음으로 써내려간 일기의 일부 내용이다.

그는 스무 살이 되기도 전에 매독에 걸렸다. 그때부터 자신의 치료 과정을 일기로 써내려갔다. 그가 남긴 이 기록은 가치를 따질 수 없을 만큼 진귀한 자료에 해당한다. 1519년 후텐은 이 책이 출판되어 나오자 당시 대주교였던 알반(Alben of Mayence)에게 바로 건넸다. 후텐처럼 자신의 경험을 책으로 엮은 인물에는 아편중독자로 실제 자신의 이야기를 다뤘던 드퀸시(De Quincey)가 있다.

후텐의 《매독일기》에 나오는 일부분을 살펴보자. “고름에서 나온 진물이 피부조직에 침투하고 있었으므로 수은 치료를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의사는 뜨거운 수은 연고를 고름이 맺힌 종기에 바른 후 밀폐된 화로 속으로 나를 밀어 넣었다. 신선한 공기를 마실 수 없었으므로 허약한 환자들은 이 과정에서 질식해서 목숨을 잃거나 심장 쇠약에 걸렸다. 그곳에 머무는 30일 동안 ‘기아치료(饑餓治療)’를 받았다. 밀폐된 화로 안은 뜨거운 석탄으로 인해 찌는 듯이 더웠으므로 환자들은 수건을 끊임없이 바꿔야 했다.”

이처럼 고통스러운 과정 때문에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고 그만두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후텐은 10여 차례 수은 치료를 받은 후 건강을 되찾았다. 그 후에 드디어 유창목이 발견되었다. 그는 40여 일 동안 유창목 즙을 복용한 후 매독에서 완치될 수 있었다.

1907년부터 1943년까지는 매독치료에 ‘비소(砒素)’를 사용했다. 1905년 드디어 매독의 병원체가 발견된 후 독일의 내과의사이자 혈청학자였던 파울 에를리히(Paul Ehrlich, 1854~1915)와 일본인 하타 사하치로(秦佐八郞, 1873~1938)에 의해 ‘기적의 비소제’인 ‘살바르산’이 등장했다. 이 약은 매독 나선균뿐만 아니라 다른 나선균도 파괴할 수 있었다. 그 후 수은보다 치료효과가 월등한 비스무트(Wismut, 질소족에 속하는 약간 붉은빛을 띤 은백색의 금속 원소로 자석에 반발하는 반자성 성질이 있고 수은을 제외한 금속 중 열전도도가 가장 낮다)로 만든 치료제도 등장했다.

1943년 페니실린이 발명되어 매독치료의 새 시대가 열렸다. 페니실린은 매독 나선균의 활동을 억제하는 효능이 뛰어났으며 부작용이 적고 나선균을 완벽하게 제거할 수 있었다. 1950년대에 접어들면서 새로운 항생제가 계속 발명되었기 때문에 매독은 6세기 전 만연할 때처럼 더 이상 공포의 대상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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