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장 17세기 의학 — 과학의 황금기

동물이 기계인가? 사람이 기계인가? 이는 17세기 유럽을 뜨겁게 달구었던 의학계의 논제였다.

유럽학계는 물리학파와 화학파로 나뉘어 논쟁이 끊이지 않았지만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당시의 논제들은 수세기 동안, 아니 지금까지도 여전히 의학계의 풀리지 않는 과제를 던져주고 있다. 가장 오래되고 가장 간단한 문제가 어쩌면 가장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인지도 모른다.

갈릴레이, 케플러, 뉴턴 등 천재적인 과학자들이 배출되었던 17세기에는 물리학의 뼈대가 형성되던 시기였다. 기계역학은 단지 과학의 한 영역에 그치지 않고 학계 전반의 새로운 세계관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의학도 예외일 수 없었다. 물리학파의 거장 데카르트는 인간의 영혼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는 자신의 저서 《우주론 Le Traité de la monde》에서 동물도 인간도 우주의 주요 구성요소로 간주하고 있다. 또한 두 개의 논문, 《인체론》과 《인간, 태아발생론 L’Homme, et unTraité de la formation du foetus》에서 동물의 생리체계를 기계론적 사고로 해석했다. 즉 인체는 하나의 기계와 같아서 인간의 질병은 기계 고장과 같은 논리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인간의 뇌는 오묘하기 그지없는 장치이며 인체는 심장에 의해 운용된다. 또한 혈액은 동력을 제공하는 기기라고 보았다. 그는 ‘반사’의 개념을 처음으로 제기한 인물이다. 감각기관이 자극을 받은 후 즉각적으로 보이는 모든 반응을 ‘반사운동’이라고 정의했다. 반사운동은 무의식적인 기계반응으로 신경계통의 구조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이탈리아는 갈릴레이의 영향으로 물리학의 중심지로 거듭났다. 말피기의 스승이기도 했던 보렐리는 이탈리아 나폴리 출신으로 피사 대학의 교수였다. 그는 말피기와 함께 동물의 해부학과 생리학을 연구했다. 보렐리에 의해 피사 대학은 수학과 생리학 두 분야에서 큰 명성을 얻어 자연과학의 새로운 실험기지로 주목받게 되었다.

보렐리의 저서 《동물의 운동에 대하여》에는 수학 공식과 기계학 원리로 동물의 운동을 설명하고 있다. 그는 운동 중에 소모되는 에너지 측량을 시도하기도 했으며 당시 ‘신경액체’로 불렸던 가상의 물질이 근육으로 유입된 후 근육이 수축할 때 근육의 강도를 증가시킨다는 것을 증명했다. 또한 지렛대 원리를 이용해 손과 팔의 운동 원리를 설명하기도 했다. 보렐리는 인체의 모든 생리, 병리 현상을 기계의 법칙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이론은 여전히 가상의 단계에 머물렀다. 일례로 통증은 신경 경련, 즉 신경관이 막혀 신경액체가 정체되면서 빚어지는 현상이며 질병의 원인이 된다고 설명했다. 그의 모든 이론은 관찰과 실험, 그리고 수학적 분석에 의해 도출한 것이므로 큰 의의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물리학파가 제기한 기계론은 의학 발전에 새로운 루트를 열어줌으로써 해부학과 생리학에서 미처 얻지 못한 풍부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는 19세기에 실험생리학과 세포생리학, 그리고 20세기에는 분자생물학이 발전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당시 물리학파와 첨예하게 대립했던 학파가 바로 화학파이다. 당시는 ‘화학’이란 단어에 지금처럼 과학적 위력이 묻어나지 않던 시절이었다. 의사들이 화학파의 편에 섰던 가장 주요한 이유는 바로 ‘체액설’을 신봉했기 때문이었다. 파라셀수스의 ‘4원소설’을 가장 대표적인 예로 꼽을 수 있다. 파라셀수스는 생리학과 화학 영역에 직접적인 공헌을 하지는 않았지만 화학파의 기반을 형성한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의 화학, 엄밀히 말해 연금술은 화학이 과학의 한 영역으로 독립하는 기반을 제공했기 때문이었다. 파라셀수스의 제자였던 헬몬트는 스승의 사상을 이어받아 생명을 하나의 화학적 현상이라고 믿었다. 그는 인체의 진정한 원소는 공기와 물이라고 단언했다. 그가 한 실험 가운데 유명한 ‘버드나무 실험’은 모든 식물이 ‘물’이라는 원소에서 탄생했다는 믿음을 더욱 견고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공기와 관련해 스스로를 ‘공기의 발명자’라고 자칭하곤 했다. 헬몬트가 생리학에 끼친 공헌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사실은 효소와 소화과정에 대한 논술이다. 그는 위, 간을 비롯한 신체 각 부위에 모두 특수한 효소가 있어서 소화, 그리고 기타 생리적인 변화를 주도한다고 생각했다. 위액은 산성이며 담즙은 알칼리성으로 이 두 액체가 십이지장에서 중화되는데 산성과 알칼리성의 균형이 무너지면 질병에 걸리게 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질병 치료는 중화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도록 균형을 맞춰주는 과정이라고 여겼다.

이 학설이 다소 엉성하긴 해도 일부 이론은 현대 효소학과 소화이론에 근접해 있다. 그의 저서 가운데 《요도결석에 대하여》는 무수한 화학실험을 바탕으로 저술한 것으로써 그가 가장 자부심을 느끼는 저서이다.

헬몬트의 실험정신과 저서는 영국 왕립과학학회의 회원이었던 보일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보일은 화학을 엄연한 과학의 한 분야로 독립시킨 인물이다. 그는 공기도 하나의 물질이므로 중량이 존재한다고 여겼다. 또한 실험을 통해 공기 중에 호흡에 꼭 필요한 물질이 있음을 밝히며 ‘보일의 법칙’을 세웠다. 이러한 기반을 바탕으로 화학파를 대표하는 과학자 메이요(Mayow, 1643~1679)가 등장했다. 그는 연소, 호흡의 개념을 정립하고 정맥혈이 동맥혈로 바뀌는 과정에 어떤 물질이 관여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는데 그 물질이 바로 산소라고 주장했다.

화학파의 전성기는 라이덴 대학에 임상의학과를 개설한 실비우스가 등장하면서부터이다. 그는 인체의 모든 생리현상을 화학적 입장에서 해석한 인물로 일체의 생명현상을 실험실에서 다시 재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당시 화학파 속에 비집고 있던 신비주의적 색채를 과감하게 버리고 생물의 생리과정이 무생물의 화학과정과 다를 바 없다고 여겼다. 실비우스는 라이덴 대학에 세계 최초의 정규 화학실험실을 설립하고 생명현상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산, 알칼리, 염 등을 통해 실험한 결과 그는 산성과 알칼리성의 상호작용에 의해 건강과 질병이 결정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따라서 산성과 알칼리성이 조화를 이루도록 치유하면 질병이 낫게 된다고 주장했다.

영국 화학파의 대표적인 인물은 토마스 윌리스(Thomas Willis, 1621~1675)이다. 그는 최초로 당뇨병 환자의 소변에서 단맛이 나는 사실을 밝혀냈다. 당뇨병을 ‘윌리스 병’이라고 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그는 중증 근육무력증의 증상을 묘사하고 ‘산욕열’의 이름을 명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저서 가운데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은 역시 신경계통의 연구를 다룬 《대뇌해부학 Cerebri Anatome》이다. 옥스퍼드 대학의 천재 건축가 크리스토퍼 렌(Christopher Wren, 1632~1723)이 삽화를 담당해 그 가치가 한층 높아졌다. 이 책에서는 부신경척수부(윌리스 신경)를 최초로 묘사했으며 대뇌하부의 대뇌동맥고리를 ‘윌리스 환’이라고 명명했다.

물리학파는 생명 관련 현상을 화학적으로 접근하는데 반대했다. 아마도 그들이 화학지식에 무지했던 탓일 것이다. 또한 화학파가 물리학적 해석을 거부한 것은 어쩌면 화학에 대한 편애와 집착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들은 서로 자신들만이 의학의 유일한 열쇠를 쥐고 있다는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나 화학파 내부적으로도 보렐리는 ‘위’를 ‘화로’에 비유하며 소화과정에만 치중했고 헬몬트는 ‘효소 연구’에만 몰두했다. 양대 학파의 논쟁은 한 세기가 지난 후에야 영국의 외과의사 존 헌터(John Hunter)가 ‘균형’을 주장하면서 겨우 해결되었다. 그는 “누구는 위를 ‘화로’라고 하고 누구는 ‘발효통’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사실을 기억하자. 위는 위일 뿐이다.”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인간을 기계에 비유한 물리학파의 논리는 교회의 비판은 둘째치고 일반 사람들마저도 이처럼 철저한 유물론적 관점에 반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화학은 연금술의 영역에서는 벗어났지만 체계적인 과학의 틀을 형성하지 못했으므로 인체의 생리, 병리현상을 화학적 논리로 완벽하게 해석해 내지 못했다. 일부 학자들은 생기론(vitalism, 생명 현상은 물리적 요인과 자연법칙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고, 그와는 원리적으로 다른 초경험적인 생명력의 운동에 의하여 창조, 유지, 진화된다는 이론)의 함정에 빠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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