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뇨병 환자의 구세주, 프레드릭 벤팅
당뇨병 환자의 구세주, 프레드릭 벤팅
  • 이성규 The Science Times 객원기자
  • 승인 2019.09.04 15: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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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노벨 생리의학상의 주인공은 인슐린을 발견한 프레드릭 밴팅 박사와 매클라우드 교수로 결정됐다. 캐나다 정부는 밴팅의 수상을 기려 연금 지급을 결정했으며, 그가 인슐린으로 당뇨병 환자를 최초로 치료한 토론토종합병원 앞에는 밴팅연구소가 세워졌다. 또한 당뇨병으로 고생하던 영국 왕 조지 5세는 그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했다.

인슐린을 발견해 수많은 당뇨병 환자들을 구한 공로를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밴팅은 노벨상 수상 후 상금의 절반을 동료인 찰스 베스트와 나누어 갖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하고 즉시 실행에 옮겼다. 그러자 공동 수상자였던 매클라우드 역시 자신의 상금을 인슐린 연구에 참여했던 생화학자 제임스 콜립과 나누겠다고 밝혔다. 도대체 이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1891년 캐나다 온타리오주의 한 시골마을에서 태어난 밴팅은 어릴 적부터 생물 실험에 관심이 많아 농사를 짓던 아버지의 소가 죽으면 직접 해부하기도 했다. 토론토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정형외과 수련의를 거친 그는 토론토에서 약 200㎞ 떨어진 런던시에서 개업했다.

사실 그가 그곳까지 가서 개업한 것은 토론토의과대학에서 연구원 자리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타지에서 온 시골 출신의 의사가 개업한 병원을 찾는 환자는 별로 없었고, 생계를 위해 그는 틈틈이 그곳에 있던 웨스턴온타리오 대학에서 강의를 해야 했다.

그 무렵 밴팅은 당뇨병의 치료법을 연구하기로 결심했다. 어릴 적부터 단짝이었고 의과대학도 함께 다녔던 친구가 당뇨병에 걸려 서서히 죽어가는 걸 지켜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췌장에 있는 랑게르한스섬에서 분비되는 물질이 당뇨병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에 착안해, 개의 췌장관을 묶으면 당뇨병을 치료할 수 있는 물질을 추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그때까지 많은 이들이 그 물질을 추출하는 데 실패한 이유가 췌장에서 분비되는 트립신 때문일 수도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트립신은 단백질을 분해하는 효소다. 따라서 췌장관을 묶어 트립신의 분비를 막는다면 랑게르한스섬에서 분비되는 물질도 분해되지 않고 그대로 추출할 수 있다는 게 이 아이디어의 요지다.

그는 자신의 실험 계획을 웨스턴 온타리오 대학에 알리고 실험실 사용을 부탁했으나 거절당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모교인 토론토대학을 찾아갔다. 이때 만난 이가 바로 생리학과 교수인 매클라우드였고, 그는 방학 기간에 빈 실험실의 사용을 허락받았다. 매클라우드는 밴팅의 실험에 회의적인 입장이었지만, 의대생인 찰스 베스트를 조수로 붙여주기까지 했다.

밴팅은 베스트와 함께 개의 췌장관을 묶은 다음 며칠 기다렸다가 랑게르한스섬의 조직을 분석하고 그 추출물을 췌장이 제 기능을 못하는 다른 개에게 주사하는 실험을 반복했다. 하지만 91마리째까지 아무런 결과도 얻지 못했다.

그런데 92마리째 실험에서 기적처럼 성공했고, 그들은 랑게르한스섬으로부터 추출한 물질에 ‘아일레틴’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섬에서 생성되는 화학물질이라는 의미였다. 이후 아일레틴은 매클라우드의 제안에 의해 같은 뜻의 라틴어인 ‘인슐린’으로 바뀌었다.

밴팅은 인슐린의 효과를 입증하기 위해 도축장을 다니면서 소와 돼지의 췌장을 수집했다. 그 과정에서 실험비가 부족해 자신이 타고 다니던 차를 팔기까지 했다. 밴팅의 실험이 성공할 가능성이 높아지자 매클라우드도 서서히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매클라우드는 자신의 연구소에서 일하는 생화학자 제임스 콜립을 밴팅에게 보내 활성물질의 다량 추출을 도왔다.

그들은 당시 개최됐던 미국생물학회에 논문을 제출하기로 했고, 논문 초록 작성을 매클라우드에게 부탁했다. 초록의 제출 시점이 너무 임박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해서 자연스레 매클라우드의 이름도 논문에 실리게 됐다.

1922년 1월 13세의 당뇨병 환자에 인슐린을 투여해 최초로 성공적인 치료가 이루어졌으며, 이 성공 소식은 전 세계적으로 큰 관심을 모았다. 그리고 다음해인 1923년에 밴팅과 매클라우드에게 노벨상이 수여된 것이다.

밴팅이 자신의 상금을 베스트와 공개적으로 분배한 것은 사실 매클라우드의 노벨상 공동수상에 대한 우회적인 이의 제기였다. 밴팅은 매클라우드보다 베스트가 자신의 실험에 훨씬 더 많이 기여했다고 생각했다. 사실 매클라우드는 실험의 조직적 측면에서만 기여했을 뿐이다.

하지만 매클라우드의 입장은 달랐다. 독일에서 공부한 영국 출신의 그는 인슐린 발견이 자신의 실험실에서 이루어졌으므로 책임자인 자신의 노벨상 수상이 당연하다고 여겼다. 따라서 그는 강연 등에서도 은연중에 자신이 연구책임자이며 밴팅은 자신의 밑에 있는 연구원일 뿐이라는 요지의 말을 하곤 했다.

어쩌면 당시 학계의 관행이라고 볼 수 있는 매클라우드의 수상에 대해 밴팅이 반기를 든 것은 평소 그의 우직한 성품을 감안할 때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는 베스트와 함께 인슐린 제조 특허권을 토론토대학에 사실상 무상으로 양도했다. 그 후 토론토대학은 인슐린 제조권을 제약회사 ‘릴리’에 넘겼으며, 덕분에 인슐린은 1년도 채 되지 않아 당뇨병의 표준 치료법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밴팅은 토론토 의과대학 재학 중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군의관으로 입대해 당시 격전지 중의 하나였던 프랑스에서 활동했다. 그런데 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그는 ‘밴팅 & 베스트 연구소’ 소장 자리를 박차고 다시 자원입대했다가 1941년 뉴펀들랜드의 눈 덮인 산중에 추락해 사망했다.

밴팅은 노벨상을 수상한 최초의 캐나다인이었다. 하지만 그보다는 이 같은 영웅적인 행동 때문에 그는 캐나다에서 아직도 우상으로 남아 있다. 그의 사망 후 밴팅 & 베스트 연구소의 소장 자리는 연구 동료였던 찰스 베스트가 이어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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