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병 극복한 천재 수학자, 존 내쉬
조현병 극복한 천재 수학자, 존 내쉬
  • 이성규 The Science Times 객원기자
  • 승인 2019.10.04 16: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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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록체인은 4차 산업혁명의 특성인 초연결과 초지능을 강화하는 핵심 기반기술이다. 그런데 블록체인에서 채굴업자, 플랫폼 사용자, 토큰 보유자 등은 중앙화된 권위에 의해 통제받지 않는다. 그럼에도 블록체인의 신뢰성이 유지되는 것은 바로 게임이론 덕분이다.

게임이론이란 각자 자신의 이익을 최대화하기 위해 경쟁할 때 최적으로 선택하는 방법을 수학적으로 분석하는 이론이다. 블록체인이라는 큰 틀에서 각자 게임에 참여하고 있는 이들은 다른 참여자들의 행동을 예측해 자신의 이익을 최대화하는 방향으로 행동하게 되는데, 바로 이 같은 내쉬균형이 블록체인 플랫폼 알고리즘의 핵심이다.

게임이론의 한 형태인 ‘내쉬균형’은 존 포브스 내쉬라는 비운의 천재 수학자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이론이다. 1994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그는 2002년 개봉돼 오스카상에서 최우수작품상 등 4개 부문을 휩쓴 영화 ‘뷰티플 마인드’의 실제 주인공으로 더욱 유명하다.

 

존 내쉬는 1928년 6월 13일 웨스트버지니아주의 작은 마을 블루필드에서 전력회사의 엔지니어였던 아버지와 라틴어 교사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그는 혼자서 장난감을 가지고 놀거나 독서를 즐기는 조용한 아이였다. 또한 학교에서는 학습지진아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공부에서도 뒤떨어졌다.

하지만 그는 수학만은 매우 좋아했다. 13살 때 E. T. 벨의 명저 ‘수학의 사람들’이라는 책을 잃고 큰 감명을 받았으며, 유명한 ‘페르마의 정리’를 증명한 뒤 남모를 전율을 느끼기도 했던 것.

그가 진학한 대학은 피츠버그에 있는 카네기 공과대학(현 카네기 멜론대학)의 화학공학과였다. 엔지니어 출신인 아버지의 뒤를 잇기 위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그는 전공을 화학으로 변경했다가 다시 수학으로 바꿔 1948년에 학사 및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수학 박사과정을 공부하기 위해 대학원에 진학하려던 그는 하버드대학과 프린스턴대학 두 곳에서 입학 허가를 받았다. 그가 택한 곳은 컴퓨터의 아버지이자 게임이론의 창안자인 존 폰 노이만이 있던 프린스턴 수학과였다.

게임이론의 이론적 기초는 폰 노이만과 모르겐슈테른이 1944년에 공동으로 저술한 ‘게임이론과 경제행동’에서 비롯됐다. 존 내쉬 역시 프린스턴 박사학위 논문으로 ‘비협조적 게임이론’이란 27쪽짜리 논문을 1950년에 제출했다.

이 논문과 더불어 그가 ‘미국립과학원회보’에 게재한 ‘n명 게임에서의 평형점’이라는 2쪽짜리 논문 2편에 의해 게임이론의 새로운 버전인 ‘내쉬균형’의 개념이 정립됐다.

사실 폰 노이만과 모르겐슈테른이 제시한 게임이론은 주로 두 사람이 참여하는 비협조적인 제로섬 게임은 잘 설명했지만 경쟁과 협력이 혼재하는 인간 행동의 복잡한 측면을 설명하는 데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반면에 존 내쉬는 여러 사람이 참여하는 비 제로섬 게임에서도 항상 균형을 이루는 해법이 있다는 사실을 수학적으로 증명해냈다.

당시 주류 경제학자들의 주장과는 대립되는 존 내쉬의 연구 결과에 대해 폰 노이만은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내쉬균형의 개념은 갈수록 경제학뿐 아니라 사회과학, 진화생물학 등의 분야에도 적용될 만큼 영향력이 커졌다.

시카고대학의 경제학자 로저 마이어슨은 존 내쉬가 제시한 내쉬균형에 대해 “20세기에 이룬 뛰어난 지적 진전 중 하나로서 경제학과 사회과학의 기초적인 분야 어디에나 영향력을 미치고 있어 생명과학에서의 DNA 이중나선 구조 발견에 필적할 만하다”고 치하할 정도였다.

1951년 23세의 나이로 MIT(메사추세츠 공과대학) 교수가 된 존 내쉬는 1958년 수학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인 필즈상의 후보로 거론될 만큼 명성을 날렸다. 하지만 너무 젊다는 이유로 그는 필즈상을 결국 받지 못했다.

바로 그 다음해 열린 한 학회에서 리만가설에 대한 강의를 할 때부터 그는 이상한 증세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이후 그의 조현병 증세는 날로 심해져 갔다. ‘신문에 나만이 해독할 수 있는 은하계의 암호가 게재됐다’고 외치는가 하면 ‘전 세계적인 평화의 왕자’ 혹은 ‘극비의 구세주적 존재’를 자처했다. 결국 그는 정신병원에 입원해야 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던 그는 1963년 아내와 이혼까지 하며 바닥으로 추락했다. 하지만 그는 1980년대 후반 학계에 다시 등장하며 재기에 성공했다. 그의 조현병을 기적적으로 낫게 한 결정적 요인은 이혼 후에도 그를 곁에서 지켜준 아내의 헌신과 수학적 재능을 인정하고 끝까지 그를 품어준 프린스턴대학의 배려심이었다.

MIT 교수 시절 제자였던 아내 얼리샤는 이혼 후 1970년부터 동거인 형태로 함께 지내면서 그의 치료에 도움을 주었다. 또한 모교인 프린스턴대학은 의식주 걱정 없이 교내에서 연구생활을 하며 그를 자유롭게 지낼 수 있게 해주었다.

1994년 노벨위원회는 폰 노이만과 모르겐슈테른의 논문 발표 50주년을 맞아 게임이론 연구자들에게 노벨 경제학상을 주기로 의견을 모았다. 미국의 존 C. 하사니와 독일의 라인하르트 젤텐이 유력한 후보였다.

문제는 후보 중 마지막 한 명인 존 내쉬였다. 경제학자가 아닌 수학자이며 게다가 심한 조현병을 앓은 환자에게 노벨상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의견으로 인해 그해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발표는 1시간 30분이나 늦어졌다.

그런 논란 가운데서도 그는 결국 그해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완전히 재기한 그는 물리학, 화학, 생물학 등의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는 편미분방정식 분야에서 획기적 기여를 한 공로로 2015년에는 수학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아벨상의 공동 수상자로도 선정됐다.

하지만 영화보다 더 드라마틱한 그의 운명은 거기까지였다. 2015년 5월 23일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아벨상을 받고 귀국해 자신이 살던 프린스턴타운십으로 택시를 타고 가던 중 교통사고로 인해 존 내쉬 부부는 그 자리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당시 그와 함께 공동으로 아벨상을 받은 수학자 루이스 니렌버그는 “존 내쉬는 진정으로 위대한 수학자이자 천재였다”며 고인을 추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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