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추다. 구름사이 비추는 조각 햇빛을 따라서 온갖 상념을 지워내며 유연자적 걸어본다. 낙엽 사이로 지난 세월이 보이고 아픈 상처도 보인다. 바람은 빈가지에서 수런거리고 모든 색채, 모든 향기, 모든 생기가 사그라져 가고 있다. 힘없는 햇살에 초목들의 몸짓이 구슬프다. 속절없이 시간이 흘러 계절이 바뀌어 찬바람에 꺾기고 서리에 무너져 초라하게 갈색세상이 되었다. 만추의 갈색이지만 아직 형체가 살아있는 메마른 억새가 눈에 들어온다.  

가을 산하를 장식하던 ‘억새’는 벼과의 다년초이다. 물억새, 참억새 등이 16종이 서식하고 새, 드렁새, 벼, 옥수수 등과 같은 집안들이다. 산형차례로 피어난 무채색의 억새꽃는 화려한 색채나 우아한 자태도 없다. 가을의 서정을 알리기에는 너무나 조악하고 거칠다. 꿋꿋한 줄기에서 힘차게 솟아나는 한 개의 꽃송이는 담담함에 간결하고 단순 하다.

 

햇살을 받고 시간이 흘러서야 은빛으로 변한다. 은빛에 투영되는 순간 화사한 노을에 황금빛 마법사로 가을여심을 붙잡았다.

억새의 이름은 억세다는 의미의 ‘억’과 풀이라는 의미의 ‘새’로서 억센 풀이다. 무진장 겁나게 돈 많은 새라고 할 수도 있고, 억을 세고 있는 부자도 되고, 억수로 좋은 ‘억새꽃’이다. 억새의 잎줄기를 잡아당기다 손바닥을 벤 아픔이 있다.

풀(草)은 연약하고 부드러운데 어찌 이리도 섬뜩하게 억센가. 우선 ‘새’ 라는 말부터 살펴보면 날아다니는 새(鳥), 새롭다는 새(新), 사이라는 새와 억새처럼 외떡잎식물들을 지칭하는 명칭이 새다. 대중가요 가사에 나오는 ‘으악새’는 경기도 지방의 방언으로 억새를 지칭하는 뜻이 아니라 뒷동산에서 들려오는 새소리였다고 한다.

 

벼과 식물들은 특이하게 다른 식물들은 섭취하지 않는 규소(硅素)를 좋아한다. 규소는 모래 속에 함유되어 있는데 유리를 만드는 원료이다. 규소를 흡수하여 식물체가 강건해 햇빛을 많이 받고, 병해충과 쓰러짐을 막으며 초식동물로부터 자기 방어를 하려는 전략이다.

억새밭에 가면 억새꽃의 쓰러짐 없이 꼿꼿이 서있는 것은 규소 덕분이다. 규소와 산소로 구성된 비료가 규산(sio₂)질이다. 벼과식물들은 규산을 질소질 비료보다 8배 이상 흡수하니 잎줄기의 강도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갈 것이다.

규산은 세포에 들어가서 규화세포를 형성하여 숨구멍이나 잎 표면을 통해서 날아가는 수분을 20~30%정도 막아주어 가뭄에 견디는 힘도 키워준다. 거친 환경을 견디게 하는 힘의 원천이다. 또한 장마철에는 식물체내의 산소량을 높이거나 엽록소를 파괴하는 에틸렌 호르몬의 생성을 억제하여 습해를 막아 준다.

 

억새와 갈대를 혼동하고 있어 구별법을 정리한다. 일단 벼과이고 꽃피는 시기는 비슷하다. 억새는 산비탈에 살고, 갈대는 바닷가, 강변에 살고 있다. 억새는 1~2m정도지만 갈대는 2~3m정도이다. 억새꽃은 부채꼴이 간결하고 은색이라면 갈대꽃은 부채꼴은 비슷하지만 꽃술이 동그랗게 뭉쳐서 피며 갈색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억새는 산에 사는 귀공자 같은 자태이고, 갈대는 바닷가에 사는 촌부 같은 자태라고 할 수 있겠다. 

꽃말이 ‘친절’ ‘세력’ ‘활력’이다. 고개 숙이며 방긋방긋 웃으니 친절하고 가을의 서정과 만추에는 따스함을 주는 고마운 존재이나 보다. 왕성한 생명력으로 세력을 넓혀가고 억센 활력이 넘치는 산에 사는 귀공자이나 보다. 모든 색깔, 모든 향기, 모든 생기가 사그라지고 저물어가는 길목에 메마른 억새가 처연하게 서있다. 힘없는 햇살에 억새의 몸짓이 구슬프고 황량함이 짓누르고 있다.

빈가지에 영근 은빛의 꽃술은 퇴색되어 흔들거리는 힘도 없어 보인다. 모든 게 떠나갔고 흩어졌고 돌아갔다. 마지막 남은 꽃술을 바라본다. 힘은 없지만 또 하나의 힘이 있다. 그 힘의 사랑은 따스함이다. 날카롭던 잎줄기가 서리를 맞아 부드러워져 추위와 눈보라도 막아주며 산토끼, 고라니들의 은신처이고 보금자리가 되었다.

또한  풀이 없는 겨울에 긴요한 먹이가 된다. 도도하고, 무섭고, 꼿꼿하게 콧대가 높았지만 겨울에는 모든 것을 내어주는 부드럽고 따뜻하며 헌신적인 사랑을 주고 있다. 

<필자 약력>

30여년간 야생화 생태와 예술산업화를 연구 개발한 야생화 전문가이다. 야생화 향수 개발로 신지식인, 야생화분야 행정의 달인 칭호를 정부로부터 받았다. 구례군 농업기술센터소장으로 퇴직 후 한국야생화사회적협동조합 본부장으로 야생화에 대한 기술 나눔과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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