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세계경제포럼(WEF)
자료=세계경제포럼(WEF)

[뉴스로드] “한국은 여성이 살아가기 힘든 나라다”, “아니다. 한국처럼 여성이 안전한 나라는 드물다”

최근 젠더 이슈가 중요한 사회적 이슈로 부각되면서 한국의 성 평등 수준에 대해 빈번하게 남녀 간 논쟁이 이뤄지고 있다. 하지만 논쟁을 통해 합의점이 도출되기는커녕 조금이라도 이견이 좁혀지는 경우를 보기 어렵다. 

한국의 성 평등 논쟁에서 합의가 어려운 가장 큰 이유는 젠더 이슈가 단순히 사회경제적 차원을 넘어선 문화적이고 일상적인 차원의 차별을 다루기 때문이다. 하지만 논쟁이 끝나지 않는 또 다른 이유는 눈으로 확인 가능한 통계적 지표조차도 서로 다른 결론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공신력 있는 국제기구들이 매년 국가별 성 평등 수준을 측정하기 위한 다양한 지표를 발표하고 있는데, 한국의 순위는 각 지표에 따라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뉴스로드>는 성 평등 논쟁에서 자주 인용되는 다양한 성 평등 지표의 특성을 비교하고, 한국의 실제 성 평등 수준은 과연 어느 정도인지 짚어봤다.

2018년 성 격차 지수(GII)에서 한국은 0.058을 기록해 세계 10위, 아시아 1위를 차지했다. 자료=유엔개발계획(UNDP)
2018년 성 격차 지수(GII)에서 한국은 0.058을 기록해 세계 10위, 아시아 1위를 차지했다. 자료=유엔개발계획(UNDP)

◇ GII 10위, GGI 108위, 한국의 진짜 '순위'는?

유엔개발계획(UNDP)이 발표하는 성불평등지수(Gender Inequality Index, GII)는 “한국은 여성에게 가장 안전한 나라”라고 주장하는 남성들에게 가장 신뢰받는 지표 중 하나다. 최근 UNDP가 발표한 인간개발보고서(HDR)에 따르면, 189개국을 대상으로 한 GII 조사에서 한국은 0.058을 기록해 세계 10위, 아시아 1위를 기록했다. 

GII는 0에 가까울수록 완전한 평등을, 1에 가까울수록 완전한 불평등을 뜻한다. GII를 기준으로 하면 한국은 거의 완벽한 성 평등 국가다. 실제 GII로 볼 때, 한국보다 성 평등이 잘 실현된 국가는 스위스, 덴마크, 스웨덴 등 서유럽 일부 국가뿐이다. 

반면 “한국은 여자로 살기 힘든 나라”라고 하소연하는 여성들이 가장 주목하는 지표는 세계경제포럼(WEF)이 발표하는 성 격차 지수(Gender Gap Index, GGI)다. 최근 WEF가 발표한 ‘2020 성 격차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GGI는 0.672로 조사대상 153개국 중 108위였다. 

GGI는 GII와 반대로 1에 가까울수록 완전한 평등을 의미한다. 한국의 GGI는 지난해(0.657, 115위)보다 소폭 상승했으나, 지표 상으로는 여전히 성 불평등이 상당히 심각한 수준이다. 

◇ GII와 GGI가 보여주는 ‘성 불평등’의 다른 모습

두 지표 상에서 한국의 순위가 이처럼 큰 차이를 보이는 이유는, 각 지표가 보여주고자 하는 성 불평등의 단면이 다르기 때문이다. 우선 GII는 모성 사망비, 청소년 출산율, 여성의원 비율, 중등학교 이상 교육 비율, 경제활동 참가율 등 삶의 질을 측정하는 기초적인 지표들로 구성돼있다. 특히 모성 사망비나 청소년 출산율은 성 격차를 측정하는 상대지표라기보다는 여성의 삶의 질을 측정하는 절대지표다. 의료서비스가 잘 구축돼있고 청소년 출산이 터부시되는 한국은 매년 생식 건강에 해당하는 항목에서 높은 점수를 얻으며 GII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다. 예를 들어 출생아 1000명 당 15~19세 산모가 출산한 출생아를 뜻하는 청소년 출산율의 경우 한국은 1.4명으로 전 세계에서 2위를 기록했다. 한국보다 청소년 출산율이 낮은 국가는 북한(0.3명) 뿐이다.

반면 GGI는 오로지 절대적인 여성의 삶의 질이 아닌, 남성과 여성의 격차만을 측정하는 상대지표다. GGI는 ▲경제활동 참여 및 기회 ▲교육 ▲건강 및 생존 ▲정치적 권한 등 네 가지 분야에서 남녀 간 격차를 측정하는데, GII에는 포함되지 않는 성별 임금 격차, 고위 임원 및 전문직종 내 여성 비율 등이 포함된다. 

한국이 GGI에서 상대적으로 낮은 점수를 받은 항목은 임금 격차(119위), 소득 격차(121위), 임원 및 관리직 비율(142위), 여성 의원 비율(108위) 등이다. 

두 지표가 각각 보여주려는 ‘성 평등’의 모습이 다르기 때문에 한국의 순위도 10위와 108위로 큰 차이가 나는 셈이다. GII는 생식, 건강, 교육, 경제활동 기회 등 여성이 스스로 삶을 일궈나가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 얼마나 보장되는지를 보여준다. 반면 GGI는 임금, 소득, 지위 상승의 기회, 고등교육 등 여성이 남성과 동일한 성취를 얻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지표로 구성됐다. 

따라서 GII만으로 한국이 세계 10위의 성 평등 국가라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다. GII는 ‘성 격차’를 제대로 드러내지도 못할뿐더러, 구성 지표 중 하나인 ‘청소년 출산율’의 경우 낮다고 해서 꼭 성 평등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반면 GGI만으로 한국은 다른 나라보다 여성이 살기 위험한 나라라고 주장하는 것 또한 무리다. 이번 GGI 조사에서 한국과 비슷한 순위를 기록한 국가는 가나(0.673), 케냐(0.671), 인도(0.668) 등이다. 또한, 여성 인권이 낮은 이슬람 국가나 빈곤·내전 등의 문제를 겪고 있는 국가 중 다수가 한국보다 높은 순위를 기록했다. 이는 해당 국가가 한국보다 여성이 살기 좋은 국가라기 보다는, 남성과 여성이 평등하게 살기 어려운 국가라는 것을 의미한다. 

영국 매체 이코노미스트가 발표한 유리천장지수에서 한국은 OECD 29개 회원국 중 최하위를 기록했다. 자료=이코노미스트
영국 매체 이코노미스트가 발표한 유리천장지수에서 한국은 OECD 29개 회원국 중 최하위를 기록했다. 자료=이코노미스트

◇ 성 평등 지표가 말하는 것, "한국, 여성에게 '닫힌' 나라"

그렇다면 GII와 GGI 외에 국가별 성 평등 수준을 보여주는 다른 지표는 없을까? 우선 UNDP에서는 GII 외에도 성개발지수(Gender Development Index, GDI)를 발표하고 있다. GDI는 ▲건강한 삶 ▲교육 ▲적절한 표준 삶 영역으로 산정되는 인간개발지수(HDI)를 남녀 성비로 측정한 것으로, 1보다 작으면 여성의 HDI가 남성보다 낮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부적으로는 기대수명과 평균 교육년수, 1인당 GNI(국민총소득) 등으로 구성된다. 

2018년 GDI 조사에서 한국은 0.934로 5그룹 중 전년과 동일하게 3그룹(0.925~0.950)에 속했다. GDI는 성 격차 수준에 따라 각 국가를 1~5그룹으로 구분하는데, HDI 상위 62위 이내의 초상위그룹 소속 국가들은 대부분 1~2그룹에 속한다. 반면, 한국과 아르헨티나는 3그룹에 속했으며, 이보다 낮은 그룹에 속한 곳은 사우디아라비아(5그룹)와 터키(4그룹) 등 이슬람 국가 뿐이다.

이는 남녀 소득격차가 심각한 수준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여성 1인당 GNI는 2만3228달러로 남성(5만241달러)의 46.2%에 불과하다. HDI 초상위그룹에 속한 대부분의 선진국이 60% 이상을 유지하고 있는 것에 비해, 한국의 성별 소득 격차가 심각하다는 것. 

OECD도 양성평등 관련 사회제도지수(SIGI)를 발표하고 있다. 지난 9월 발표된 SIGI에서 180개국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한국은 23%로 점수가 산출된 90개국 중 불가리아와 함께 51위를 기록했다. SIGI는 수치가 높을수록 성 불평등이 심각하다는 것을 뜻한다. 

SIGI는 ▲가정 내 차별 ▲신체적 자유 제한 ▲생산자원에의 접근 ▲시민적 자유 제한 등 4개 분야에서 다양한 항목을 평가해 산출된다. 한국은 가사분담과 노동권에 대한 법·제도적 불평등, 관리직 진출의 불평등 등에서 조사대상국 중 최하위권을 기록했다. 

영국경제매체 이코노미스트(The Economist) 또한 매년 유리천장지수(Glass-ceiling Index)를 발표하고 있다. 지난 3월 발표된 결과에 따르면 한국은 OECD 29개 회원국 중 꼴찌를 기록했다. 일본 또한 28위를 기록해 동아시아의 성 불평등 문제가 심각함을 나타났다. 

한국은 성별 임금 격차, 여성 관리자 비율, 여성 임원 비율에서 모두 꼴찌를 기록했으며, 고등 교육 기회 및 노동시장 참여율 격차에서도 뒤에서 두 번째를 차지했다. 경영대학원 진출을 뜻하는 GMAT 응시율은 전체 12위였으나 OECD 평균에는 미치지 못했다. 

이처럼 다양한 지표가 한국의 성 평등 수준에 대해 말해주는 것은 하나다. 한국은 다른 나라에 비해 여성이 안전한 나라는 맞지만, 남성과 동일한 수준의 성취를 올리기에는 너무 힘든 나라라는 것이다. 각각의 지표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심각한 소득 격차와 좁은 지위 상승 기회는 한국에 남성에 비해 여성에게 기회의 문을 닫아놓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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