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청와대 홈페이지 갈무리
사진=청와대 홈페이지 갈무리

여성의 군복무가 다시 사회적 화두로 떠올랐다. 정치권에서 시작된 논의가 각계각층으로 확산되면서, 젠더갈등의 양상으로 악화되는 모양새다.

지난 19일 청와대 국민청원게시판에는 “여성도 징병대상에 포함시켜 주십시오”라는 제목의 청원이 올라왔다. 청원인은 “나날이 줄어드는 출산율과 함께 우리 군은 병력 보충에 큰 차질을 겪고 있다”며 “여성 또한 징집 대상에 포함하여 더욱 효율적인 병 구성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해당 청원은 사흘 만에 15만명이 넘는 동의를 이끌어내 청와대 답변 요건(20만명)을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해묵은 여성 군복무 논쟁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은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제안 때문이다. 박 의원은 지난 18일 페이스북을 통해 책 출간 소식을 알리며, 책에 실린 모병제 전환 및 남녀평등복무제 도입 주장을 소개했다. 박 의원의 주장은 현행 징병제를 모병제로 전환하고, 남녀 모두 40~100간의 기초군사훈련을 의무적으로 받도록 하자는 것이다.

 

"여성도 군대를 가야한다"는 주장에 대한 성별, 연령별 응답.(단위: %) 자료=한국여성정책연구원
"여성도 군대를 가야한다"는 주장에 대한 성별, 연령별 응답.(단위: %) 자료=한국여성정책연구원

◇ 여성, 군복무에 대한 입장은?

남성인 박 의원의 제안이 이번 논쟁의 불을 지폈지만, 사실 여성 군복무는 이전부터 여성계에서 종종 논의돼온 주제다. 여성계에서는 여성의 병역의무 배제는 여성을 남성에게 보호받아야 할 의존적이고 미성숙한 존재로 보는 것이며, 여성의 병역 의무 참여를 통해 실질적 성평등을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실제 권인숙 민주당 의원은 명지대 교수 재임 시절인 2009년 ‘징병제의 여성참여: 이스라엘과 스웨덴의 사례 연구를 중심으로’라는 논문에서 “이스라엘이나 스웨덴을 보면 징병제를 통해서든 아니든 군에서의 여성 수 증가와 역할의 확대는 당연한 경향성일 뿐만 아니라 올바른 정책의 방향으로 인정받고 있다”며 “‘남자=보호하는자’, ‘여자=보호 받는 자’라는 구도가 무너져야 진정한 평등을 얻을 것이라는 판단도 징병제의 여성참여가 가지는 의미를 확인케 하는 지점”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렇다면 학자나 운동가가 아닌 일반 여성들의 군 복무에 대한 입장은 어떨까? 여론조사 결과는 남성들의 예상과는 달리 찬성 쪽이 더 많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지난 2019년 2012명(여성 976명, 남성 1036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여성도 군대를 가야한다’는 질문에 여성의 53.7%가 찬성한 것으로 집계됐다. 남성(70.8%)에 비해서는 낮은 수치지만 여성 군복무를 지지하는 비율이 절반을 넘은 것이다. 

 

사진=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 페이스북 갈무리
사진=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 페이스북 갈무리

◇ 성별 갈등으로 변질된 병역제도 논의

문제는 여성계에서 여성 군복무를 논의하던 흐름과 현재의 논의 양상이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박 의원의 제안에 여론의 관심이 집중된 후 생산적인 논의가 이어지기보다는 오히려 젠더 갈등으로 번지는 분위기다. 

실제 남초·여초 커뮤니티에서는 모두 남녀평등복무제나 여성징병제 등의 논의에 대해 냉소적인 반응이 나오고 있다. 남초 커뮤니티에서는 “여성도 동등한 병역 부담을 짊어져야 한다”는 주장과 “어차피 비현실적인 이야기”라는 목소리가 함께 나오고 있다. 여초 커뮤니티에서도 “군복무를 마친다고 해서 여성도 동등하게 봐줄지 의문”, “여성징병제가 시행되면 군 내 성차별이 더욱 문제가 될 것” 등의 우려가 제기된다. 

논의가 성별 갈등으로 흘러가자 박 의원도 수습에 나섰다. 박 의원은 21일 페이스북에서 “모병제와 남녀평등복무제는 남녀 갈등을 유발하기 위한 제안이 아니다”라며 “남녀평등복무제는 여성이라고 해서 병역 의무를 전투병, 비전투병으로 나누지 않고, 똑같이 훈련 받고 참여하자는 취지에서 나온 제안”이라고 해명했다. 

◇ 실질적 성평등 위한 노르웨이의 여성징병제 도입

국내에서 여성 군복무 논쟁이 성별 갈등으로 비화된 이유는, 여성징병제를 도입한 다른 국가와는 논의의 시작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국내에서는 ‘부담’, ‘희생’으로 여겨지는 군복무를 홀로 짊어지는 것이 억울하다는 남성들의 감정과, 아직 성차별이 심각한 상황에서 병역의무의 형평성만을 주장하는 것에 대한 여성들의 반발이 부딪히고 있다. 여성 군복무 논쟁이 병역의무 떠넘기기로 변질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반면 노르웨이, 네덜란드, 스웨덴 등 여성징병제를 도입한 곳에서는 실질적 성평등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의 하나로 여성의 군복무가 논의되기 시작했다. 실제 세계경제포럼의 ‘2021 성격차 지수’ 보고서에 따르면 노르웨이와 스웨덴, 네덜란드는 각각 3위, 5위, 31위로 남녀 간의 격차가 상대적으로 적은 국가로 꼽혔다. 이 국가들은 이미 사회 각 분야에서의 성별 격차가 상당히 좁혀진 상황에서 실질적 성평등을 실현하기 위해 여성 군복무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이들 국가는 모두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하고 있다. 병역이 ‘의무’보다는 ‘권리’나 ‘선택’, 또는 동등한 대우를 의미하는 ‘상징’으로 받아들여지는 사회적 합의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세계경제포럼이 발표한 2021 성격차지수(GGI) 순위. 자료=세계경제포럼
세계경제포럼이 발표한 2021 성격차지수(GGI) 순위. 자료=세계경제포럼

◇ 20대 제대군인 79.4% '군복무에 부정적' 환경 개선 필요

반면 한국은 같은 보고서에서 102위로 하위 35%에 해당한다. 이전 보고서에 비해 순위가 상승하기는 했으나 여전히 성별격차가 심각한 상태다. 이런 상황에서 여성 군복무 논의는 여성들에게 운동장을 더 기울게 만드려는 시도로 이해될 수밖에 없다. 

더욱 큰 문제는 병역이 ‘권리’나 ‘혜택’, 아니면 적어도 고려할만한 ‘진로’가 아닌 ‘부담’과 ‘희생’으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여성정책연구원이 지난 2019년 20대 현역 제대군인 1117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군대는 안 가는 것이 좋다’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한 20대 남성은 79.4%였다. ‘군대는 시간낭비다’(59.8%), ‘군복무는 잃는 것이 많다’(66.7%)는 질문에 대한 응답도 비슷했다.

군복무를 통해 인간적으로 성숙해졌고(74.6%) 조직생활을 배웠다는 응답(81.7%)도 많았지만, 자기계발(36.2%)이나 취업(46.9%)에 도움이 된다는 응답은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또한 응답자의 44.3% 제대 후 트라우마를 경험했으며, 5.3%는 일상생활이 어려울 정도로 심각하다고 답했다.

군복무가 미래 진로에 도움이 되지 못하고 트라우마를 남길 정도로 고통스러운 경험이라면, 여성 군복무 논의는 한 발도 앞으로 나아가기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여성 군복무를 주장하는 것은, 내가 겪은 고통을 너도 겪어야 한다는 억울함의 표현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용석 전쟁없는세상 활동가는 21일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서 “군대가 한국사회에서 굉장히 열악한 환경인 곳이기 때문에, 남성들이 차별로 인식하는 걸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며 “그 지점에 대해서 정치권이나 한국사회가 진지하게 고민해야 된다”고 지적했다.

이용석 활동가는 이어 “군대가 남성들에게는 강요된 희생을 요구하고, 여성·장애인 등에게는 군대 갈 자격을 주지 않음으로서 사회적인 위계를 나누는 방식으로 오히려 차별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라며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남자들이 차별 받으니까 여자들도 같이 고통받아야 돼’ 이런 접근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우리 사회가 20대 남성들에게 부과되는 희생을 줄이고 군대에 대한 부담을 최소로 줄일 수 있는지, 그리고 군대 갈 자격의 유무로 나뉘는 사회문화적인 위계를 어떻게 해소할 수 있는지, 이런 쪽으로 고민의 방향을 틀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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