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청와대 홈페이지 갈무리
사진=청와대 홈페이지 갈무리

최근 군 내 성폭력 피해자들이 피해사실을 고발하고 난 뒤에도 보호를 받지 못해 사망에 이른 사건이 연이어 발생했다. 지난 5월 22일에는 공군 제20전투비행단 소속 여성 부사관 A중사가 상관에게 성추행을 당해 피해를 신고했으나 오히려 2차 가해에 시달리다가 관사에서 숨진 채 발견됐고, 이달 12일에도 해군에서 여성 부사관 B중사가 비슷한 상황에 몰려 사망했다. 

성폭력은 피해자의 신체뿐만 아니라 정신에도 엄청난 상처를 남긴다. 하지만 현행법상 성폭력 피해자가 자살한 경우, 성폭력과 자살 간의 인과관계가 인정받기는 어렵다. 실제 지난 1982년 대법원은 강간 피해자가 귀가 후 음독자살한 사건에 대해 “자살행위가 바로 강간행위로 인해 생긴 당연한 결과라고 볼 수 없다”며 인과관계를 인정할 수 없다는 판결을 내린 바 있다.

사법부의 판결과 달리, 사회과학 분야에서는 성폭력과 자살·자살충동 간의 상관관계를 입증한 연구가 다수 발표되고 있다. 이 연구들은 공통적으로 성폭력 피해자의 자살이 개인적 특성으로 인해 일어난 것이 아니라, 성폭력에 의한 정신적 고통과 피해자를 돌보지 못한 부실한 대응시스템 때문임을 주장하고 있다.

◇ 성폭력 피해 여성 78.8% 이전보다 자살 충동 느껴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2012년 발표한 ‘성폭력 피해자 정신건강 현황 및 정책지원방안’ 보고서에 따르면, 피해여성 55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성폭력을 당한 뒤 자살생각이 ‘상당히 많아졌다’고 답한 피해자는 33.8%, ‘약간 많아졌다’는 34.1%, ‘이전에는 없었지만 생각을 하게 됐다’는 10.9%였다. 피해 여성의 78.8%가 성폭력으로 인해 이전보다 자살충동을 더 많이 느끼게 됐다는 것이다. 

자살충동이 고민에서 멈추면 다행이지만 실행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 보고서에 따르면, 실제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냐는 질문에도 무려 응답자의 41%가 ‘그렇다’고 답했다. 

성폭력 피해 여성들이 자살충동을 느끼게 되는 이유는 피해경험으로 인한 무력감·우울감에 휩싸이기 때문이다. 보고서에 따르면, 응답자들은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이유로 ▲사는 게 힘들어서/싫어서(16.9%) ▲삶에 대한 의욕을 상실해서(10.6%) ▲당시 사건이 떠올라서(7.2%) ▲스스로가 쓸모없는 존재로 느껴져서(6.6%) 등을 꼽았다.

실제 여성정책연구원은 회귀분석을 통해 성폭력 경험과 우울감의 상호효과가 자살충동에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러한 해석은 다른 연구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염동문 창신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가 올해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중·고등학생 6298명을 통계적으로 분석한 결과 성폭력 피해경험은 피해자의 우울감을 악화시켜 자살생각을 더 많이 하게 만드는 것으로 나타났다. 

성폭력 피해의 정도에 따라 자살충동을 느끼는 정도도 달라질까? 인제대학교 의과대학 연구진은 지난 2016년 피해 후 3개월 이내의 성추행 피해여성 36명과 강간 피해여성 22명을 비교·연구했는데, 두 집단의 우울 증상에는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차이가 발견되지 않았다. 특히 PTSD 선별검사에서는 두 집단 모두 95% 가량 유의미한 점수를 기록했다. 성추행도 강간과 같이 심각한 정신적 상처를 남긴다는 면에서, 피해의 정도와 상관없이 성폭력 피해자는 모두 자살위험에 노출될 가능성이 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성폭력 피해자들이 자살충동을 느끼게 된 이유.(단위: %) 자료=한국여성정책연구원
성폭력 피해자들이 자살충동을 느끼게 된 이유.(단위: %) 자료=한국여성정책연구원

◇ 스웨덴 연구진 "성폭력 피해, 취약계층에서 더 많이 발생"

성폭력 피해가 자살 위험을 높인다는 사실은 한국에서만 입증된 것이 아니다. 해외 연구에서도 성폭력 피해와 자살충동 간의 관계에 대한 광범위한 연구가 이뤄지고 있다.

실제 스웨덴 연구진은 지난해 무려 8만5205명의 직장인을 조사한 연구 결과를 발표한 바 있다. 연구진은 1년 내 성폭력을 경험한 4095명(남성 774명, 여성 3321명)의 피해자를 나머지와 비교했는데, 성폭력 피해자는 피해경험이 없는 사람에 비해 자살시도의 위험은 1.59배, 자살 위험은 2.82배나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경향은 성별과 상관없이 나타났는데, 남성 피해자 또한 성폭력에 의한 자살 위험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성폭력 피해자들이 죽음으로 내몰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피해자가 건강한 삶을 회복하도록 돕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필수다. 스웨덴 연구진 또한 직장 내 성폭력이 자살행동을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요인이라며, 적극적인 개입과 돌봄이 자살을 예방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이는 성폭력 피해가 취약계층에게 더 많이 발생한다는 점에서 더욱 중요하다. 실제 스웨덴 연구진 조사에 따르면 직장 내 성폭력 피해자들은 주로 어리고, 혼자 살거나 이혼경험이 있고, 임금이 적고 직위가 낮으며 직장 내 폭력이 만연한 환경에서 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직장 내에서의 성폭력에 더 많이 노출되지만 문제 해결은커녕 주변의 지지조차 기대하기 어려운 처지의 피해자들이 쉽게 정신적인 상처를 극복하리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특히, 최근의 사태처럼 군대나 직장 등 특정 조직 내에서 성폭력이 발생한 경우, 해당 조직 내에 성폭력 대응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는지는 피해자의 회복 여부를 결정하는 핵심적인 열쇠다. 대응시스템이 허술해 적극적인 개입과 피해자 보호가 이뤄지지 않을 경우 오히려 역효과를 낼 수도 있다.

실제 하버드대학 연구진이 지난 32년간 805개 기업의 직장 내 성폭력 사건 처리 과정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대부분의 기업에서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가 발생했으며, 성폭력 예방교육도 오히려 피해자 및 동료 여성에 대한 광범위한 적대감을 불러온 것으로 나타났다. 제대로 된 대응 절차가 이뤄지지 않을 경우 피해자에게 더 큰 고통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최근 군에서 발생한 억울한 죽음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소속된 조직을 믿고 피해사실을 보고했지만, 군은 이들을 보호하기는커녕 사태를 무마하고 2차 가해를 방관하는 모습을 보였다. 더 이상 피해자들이 극단적인 상황으로 내몰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기존의 조직 내 성폭력 대응방식을 재검토하고 피해자 중심의 시스템을 새롭게 구축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우울감 등 말하기 어려운 고민이 있거나 주변에 이런 어려움을 겪는 가족ㆍ지인이 있을 경우 자살예방 상담전화 ☎1393, 정신건강 상담전화 ☎1577-0199, 희망의 전화 ☎129, 생명의 전화 ☎1588-9191, 청소년 전화 ☎1388, 청소년 모바일 상담 ‘다 들어줄 개’ 어플, 카카오톡 등에서 24시간 전문가의 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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