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국회 국민동의청원 홈페이지 갈무리
사진=국회 국민동의청원 홈페이지 갈무리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는 국회 국민동의 청원이 지난 14일 10만명의 동의를 모으며 성립 요건을 충족했다. 지난 2007년부터 시작된 차별금지법 제정 시도가 6차례의 실패를 딛고 21대 국회에서 성공할 수 있을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한 청원인은 지난해 11월 동아제약 성차별 면접 사건의 피해자인 김모씨다. 김씨는 청원 취지를 설명한 글에서 “저는 만 25년 인생의 대부분을 기득권으로 살았다... 그런데 6개월 전, 이 모든 권력이 단지 저의 성별을 이유로 힘없이 바스러지는 경험을 했다”며 “그때 다시 깨달았다. 모든 권력은 상대적이기에 나 또한 언제든 약자, 즉 배척과 혐오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이라고 말했다.

김씨는 이어 “역사와 연구와 현실이, 차별과 혐오의 제거가 국가 발전의 필수 조건임을 보여줌에도, 국회는 자신들의 나태함을 사회적 합의라는 핑계로 외면하고 있다. 명백한 직무유기”라며 “헌법상 평등권 실현을 위해 국회가 바로 지금 포괄적 차별금지법/평등법을 제정해주기를 바란다”고 호소했다. 

◇ 차별금지법, 국회서 14년째 제자리걸음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인종, 성별, 장애 등 불합리한 사유로 인한 차별을 정치·경제·문화 등 모든 영역에서 금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지난 2007년 노무현 정부가 국가인권위원회 권고로 처음 법안을 발의한 것을 포함해 17~19대 국회에서 총 여섯 차례의 입법 시도가 있었으나 모두 무산됐다. 20대 국회에서는 아예 법안이 발의되지 못했고, 21대 국회에서는 지난해 장혜영 정의당 의원이 법안을 발의했으나 아직까지 논의가 진전되지 않고 있다.

얼핏 당연해 보이는 차별금지법이 번번이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14년째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는 이유는 단순하다. 바로 ‘성적지향’이나 ‘성정체성’을 불합리한 차별 사유에 포함시키는 것에 대한 반발이 크기 때문이다. 특히 보수적 개신교를 중심으로 동성애 차별 금지를 법제화하는 것에 대한 반발이 거세다. 표심을 무시할 수 없는 정치권이 조직화된 보수적 개신교계의 반발을 의식해 매번 논의를 미루다보니 차별금지법은 매번 국회에서 우선 순위가 뒤로 밀려 왔다.

이 때문에 정치인들은 차별금지법에 대한 입장 표명을 요구받을 때, 아직 ‘사회적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답변을 내놓곤 한다. 실제 2012년 대선에서 차별금지법 제정을 공약으로 내세웠던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2017년 대선에서는 “이해와 설득을 통해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는 과정이 선행돼야 한다”며 한 발 물러섰다. 안철수 당시 후보 또한 “사회적 공론화와 합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며 유보적인 태도를 보였다. 

 

차별금지법제정연대가 15일 국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고 있다. 사진=차별금지법제정연대
차별금지법제정연대가 15일 국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고 있다. 사진=차별금지법제정연대

◇ 국가 인권위 설문조사 88.5% "차별금지법 제정 찬성"

하지만 다양한 여론조사 결과를 살펴보면, 정치권의 주장과는 달리 차별금지법에 대한 ‘사회적 합의’는 이미 형성된 상태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지난해 6월 발표한 ‘21대 국회, 국민이 바라는 성평등 입법과제’에 따르면, 15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응답자의 87.7%가 “성별, 장애, 인종, 성적지향 등 다양한 종류의 차별을 금지하고 피해를 구제하기 위한 법률을 제정해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지난해 실시한 ‘2020년 차별에 대한 국민인식조사’ 결과도 비슷하다. 인권위가 전국 성인 남녀 1000명에게 차별금지법 제정에 대한 찬반 의견을 물은 결과, 전체 응답자의 88.5%가 ‘찬성한다’고 답했다. 반대는 겨우 11.5%에 불과했다. 

“동성애자, 트렌스젠더 등과 같은 성소수자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존중받아야 하고 동등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에 동의한 비율도 73.6%였다. 반면 비동의는 26.4%로 동의의 3분의 1 수준에 불과했다. 국민 4명 중 1명은 성적지향이나 성정체성을 이유로 차별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자료=국가인권위원회
국가인권위원회가 지난해 발표한 ‘2020년 차별에 대한 국민인식조사’ 결과.(단위: %) 자료=국가인권위원회

 

그렇다면 성적지향·성정체성에 의한 차별 금지에 반대하는 것은 대체 누구일까. 인권위 설문조사 응답자를 연령, 성별, 직업, 지역, 정치성향, 소득 등 어떤 기준으로 나눠 봐도, “성소수자도 동등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에 대한 동의 비율이 60%를 넘는다. 농업·임업·어업·축산업 종사자(58.3%), 기타 직업 종사자(40%), 기타 종교(50%) 등 동의율이 낮은 집단도 있지만 표본 규모가 2~12명으로 지나치게 작아 통계적으로 유의하다고 보기 어렵다. 

인권위 조사에서 표본 규모가 100명 이상인 집단 중 동의율이 60%를 넘지 않는 집단은 개신교(189명, 54.5%) 뿐이다. 실제 지난해 11월 11일 평등의 날을 기념해 시민단체들이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자, 다음 날 한국교회총연합회가 ‘위장된 차별금지법 반대와 철회를 위한 한국교회기도회’를 열고 맞불을 놓기도 했다. 한교총은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결과적으로 동성애를 조장하고 동성결혼으로 가는 길을 열어줄 것”이라며 차별금지법에 명백한 반대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반면 천주교, 불교 등 타 종교계는 성정체성 및 성적지향을 포함한 차별금지법에 비교적 긍정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 특히 불교의 경우, 대한불교조계종 사회노동위원회가 지난 5월부터 페이스북 등을 통해 차별금지법 청원 링크를 공유하고 1만 불자 참여운동을 추진하는 등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왔다. 사노위는 15일 입장문을 통해 “유독 차별금지법은 월등한 여론에도 불구하고 정부와 국회가 머뭇거리거나 외면해 왔다”며 정부와 국회에 “이번 국민동의 청원의 정신을 받아서 즉각적 차별금지법 제정에 나서기를 바란다”고 촉구했다.

천주교의 경우,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생명윤리위원회가 지난해 장혜영 의원의 차별금지법안에 찬성한다면서도 동성혼에 대해서는 명확한 반대 입장을 밝힌 바 있다. 하지만 지난달 심종혁 서강대 총장 신부가 차별금지법 최초 청원자 99인 명단에 이름을 올리는 등, 교계 내부에서도 성소수자 문제와 관련해 다양한 목소리가 나오는 분위기다. 게다가 인권위 조사에서도 천주교 신자라고 밝힌 응답자 115명 중 79.1%는 성적지향이나 성정체성과 관계 없이 동등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한다고 답했다.

결국 정치권이 내세우는 “사회적 합의가 먼저”라는 핑계는 근거가 없다고 볼 수 있다.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사실상 차별금지법과 관련된 사회적 합의는 이미 성립돼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반대 여론이 강한 개신교조차 절반 이상이 성소수자도 동등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데 동의하고 있다. 

한편 차별금지법 청원은 소관 상임위원회인 법제사법위원회에 회부돼 장혜영 정의당 의원이 지난해 발의한 법안과 함께 심사를 받게 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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