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법 개정 이후 첫 공식 분석…“충실의무 대상 확대, 경영판단 통제 기준 공백 커져”
-입조처 “독일식 명문화 검토해야…이사 책임 간 균형·기업 판단 예측 가능성 높아져”
국회가 ‘경영판단원칙(Business Judgment Rule)’을 상법에 명문화하는 방안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지난 7월 개정된 상법에서 이사의 충실의무(loyalty duty)가 ‘법령·정관 준수’에서 ‘전체 주주’로 확대되면서 이사 책임의 범위와 판단 기준이 오히려 불명확해졌다는 문제의식이 법조·산업계에서 동시에 제기돼 온 가운데, 국회입법조사처가 현안분석에서 처음으로 명문화 필요성을 제기한 것이다.
입법조사처가 상법 개정 이후 경영판단원칙을 ‘입법 과제’로 다룬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25일 국회 관계자에 따르면, 입법조사처는 '상법 개정으로 충실의무의 대상이 모든 주주로 확대됐지만, 이사 책임을 판단하는 기준은 그대로여서 해석의 혼선이 커졌다'고 지적했다. 실제 2025가합121210 판례에서 법원은 교환가액 산정 과정에서 이사회가 주주의 이익을 최대한 반영했는지를 중심으로 판단했다. 입법조사처는 이를 “충실의무 확대 이후 첫 판단 사례”로 제시하며, 이사 책임이 강화되는 방향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다만 입법조사처는 개정 취지가 충실의무를 ‘전체 주주’에게 확장한 것일 뿐 △개별 주주별 충실의무인지 △회사 전체에 대한 위임 관계인지 △적 구조는 여전히 모호하다고도 밝혔다.
입법조사처는 “상법 개정만으로 배임죄 적용 범위가 넓어진다고 보긴 어렵다”며 충실의무 확대가 형사적 책임 강화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입법조사처는 경영판단원칙 명문화 필요성에 대해 두 가지 이유를 제시했다.
첫째, 이사의 판단을 사후적으로 평가할 기준이 없다는 점이다. 한국 법원은 판례상 경영판단원칙과 유사한 판단틀을 사용해 왔지만, 법률에 명문 규정이 없어 법적 안정성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둘째, 충실의무와 주의의무의 경계가 모호하다는 점이다. 미국처럼 신인의무(fiduciary duty)를 세분화한 구조가 아니라, 한국은 ‘선량한 관리자의 주의의무’에 충실의무가 관념적으로 얹혀 있는 형태여서 판례·실무 모두에서 혼선이 반복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입법조사처는 “현행 구조는 충실의무의 범위와 이사 책임의 범위를 구분하기 어렵다”며 “명문화는 이사의 책임 한계를 명확히 하고, 기업 의사결정의 예측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고 강조했다.
입법조사처는 미국 델라웨어와 독일의 사례를 비교해 한국이 참고할 방향을 제시했다. 델라웨어는 판례법 중심으로 운용돼 상황별 탄력성은 높지만, 적용 기준의 통일성이 떨어질 수 있다고 평가했다. 반면 독일은 주식법 제93조에 경영판단원칙을 명문화해 이사 책임 기준을 법률로 고정함으로써 예측 가능성과 안정성을 높인 구조로 분석했다.
입법조사처는 독일식 명문화 방식이 △판례의 불확실성 감소 △이사 책임 범위의 명확화 △기업의 혁신적 투자 판단 촉진 등의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분석했다. 아울러 “독일식 경영판단원칙은 이사 보호가 아니라 주주 보호와 이사 책임의 균형을 맞추는 기능에 가깝다”고 설명했다.
입법조사처는 올해 상법 개정 이후 △충실의무 적용 범위 확대 △판례 중심의 사후적 통제 △의사결정 위축 가능성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경영판단원칙 명문화가 시급하다고 평가했다. “경영판단원칙의 명문화는 이사 책임 완화가 아니라 기업 의사결정의 예측 가능성을 높이는 최소한의 장치”라는 점도 강조했다.
입법조사처의 분석 문건이지만, 경영판단원칙을 상법에 명문화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국가기관이 공식 문서에서 제기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 원칙이 입법에 반영될 경우 배임 소송, 이사 책임 판단 구조, 경영권 분쟁, 사외이사 역할 등 지배구조 전반에 걸쳐 직접적인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한편, 한정애 더불어민주당 정책위의장은 이날 국회에서 열린 원내대책회의에서 "상법 개정을 통해서 자사주 성격을 명확히 규정하고 자사주 마법을 우리 자본시장에서 퇴출하겠다"며 자사주 소각 의무 등을 담은 3차 상법 개정을 연내에 마무리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재계에서는 이번 보고서를 내년 상법 개정 논의의 출발점으로 보고 있으며, 주요 기업들도 내부 통제 기준과 의사결정 절차 전반을 재점검해야 할 필요성이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뉴스로드] 최지훈 기자 jhchoi@newsroad.co.kr
